서울 성북동

시간이 머문 숨은 골목길

by 이 범

북악산 아래 예술의 마을로

"성북동 가본 적 있어?"

11월의 어느 주말, 서연이가 물었다. 대학 수업에서 한국 현대시를 배우던 중이었다.


"성북동? '성북동 비둘기' 그 성북동?"

민수가 반가워하며 물었다.

"맞아.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 왜 사느냐고 물지 말아라/ 그저 살아간다고 대답하라.'"

"아, 그 시!"

지혜도 기억했다.


"중학교 때 배웠던 거 같아."

"그 성북동에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대. 김광섭 시인, 이태준 작가, 한용운 선생..."

준우가 검색을 시작했다.


"성북동... 북악산 아래네. 청와대 근처?"

"응. 서울 중심부인데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래. 한옥도 많고."

민수가 흥미를 보였다.


"좋아. 가보자. 우리가 다녔던 곳 중에 문인들의 마을은 처음이네."

"그리고 성북동은 부자 동네이기도 해. 고급 주택가."

"창신동이랑 정반대네."

"그래서 더 흥미로워. 같은 서울인데 이렇게 다른 동네들."

다음 주 토요일, 네 식구는 지하철 4호선을 탔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역에서 나와 북쪽으로 걸었다. 완만한 오르막이 시작됐다.

"여기부터 성북동이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조용하고 한적했다.


"진짜 다른 세계다."

큰 대문이 있는 저택들, 높은 담장, 울창한 나무들.

"부자 동네 맞네."

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오래된 한옥들도 보였다.

"한옥도 많아."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

첫 번째 목적지는 심우장이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 집."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한옥이 나타났다.



"여기다."

대문에 '심우장(尋牛莊)'이라고 쓰여 있었다.

"소를 찾는 집?"

"불교에서 소는 본성을 의미해. 자기 본성을 찾는 집이라는 뜻이야."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한옥이었다. 단아하고 소박했다.


"크지 않네."

"만해 선생님은 검소하게 사셨대."

방 안을 들여다봤다. 책상, 책, 붓.

"여기서 '님의 침묵'을 쓰셨구나."

마당에 안내판이 있었다.


"한용운(1879-1944).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1933년부터 이곳에서 살았으며, 조선총독부가 보이는 남향집을 거부하고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북향?"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대. 총독부를 등지고 산 거지."

마당 한쪽에 작은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도 만해 선생님이 직접 파신 거래."

우물을 들여다봤다. 깊고 고요했다.

"8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물이 있네."

심우장을 나와 다음 장소로 향했다.


"수연산방. 이태준 작가의 집."

10분쯤 걸으니 또 다른 한옥이 나타났다.

"여기가 수연산방."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우와!"

연못, 정자, 나무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한국식 정원이었다.



"이태준 작가가 이 정원을 직접 가꾸셨대."

정자에 앉아 연못을 바라봤다.

"여기서 소설을 쓰셨겠구나."

안내판을 읽었다.


"이태준(1904-?). 소설가. 1933년 이곳에 집을 짓고 1946년 월북할 때까지 살았다. '까마귀', '돌다리' 등 많은 작품을 이곳에서 집필했다."

"월북하셨구나."

"한국전쟁 때. 그 이후 소식이 없대."

수연산방을 나와 골목을 걸었다.


성북동 골목은 미로 같았다.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길 찾기 어렵겠다."

하지만 그 덕분에 조용했다. 차도 별로 없었다.

"정말 한적해."

한 골목을 걷다가 작은 갤러리를 발견했다.


"성북동 갤러리?"

들어가니 사진 전시를 하고 있었다. 성북동의 옛 모습들.

"1960-70년대 성북동이네."

흑백 사진 속에는 한옥들, 좁은 골목, 예술가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랑 많이 다르네."

갤러리 주인이 다가왔다.

"성북동 역사에 관심 있으세요?"

"네. 처음 와봤는데 특별한 동네네요."


"그렇죠. 일제강점기부터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어요. 조용하고 경치 좋으니까."

"지금도 예술가들이 사세요?"

"몇 분 계세요. 근데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집값이 너무 올라서.


시간이 머문 골목길

갤러리를 나와 김광섭 시인의 집을 찾았다.

"성북동 비둘기를 쓴 집."

하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지?"

동네 할머니께 여쭤봤다.


"김광섭 시인 집이 어디예요?"

"저기 위로 올라가면 있어. 근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아."

"일반 주택이 된 거예요?"

"응. 옛날에는 표지판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골목을 올라갔다. 가파른 언덕이었다.


"숨차다."

중간쯤 올라가니 오래된 한옥이 보였다.

"여기인 것 같은데?"

대문이 닫혀 있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들어갈 수는 없구나."

하지만 골목 자체가 아름다웠다. 낙엽이 쌓인 좁은 길, 오래된 돌담.



"이 골목에서 '성북동 비둘기'가 태어났구나."

서연이가 시를 읊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의미심장하네."

"개발로 인해 밀려나는 것들에 대한 시야."

골목을 더 올라가니 전망이 좋은 곳이 나왔다.


"여기서 보는 서울!"

성북동 아래로 서울이 펼쳐졌다. 멀리 남산도 보였다.

"예술가들이 여기 산 이유를 알겠다. 전망이 좋아."

벤치에 앉아 풍경을 감상했다.

"조용하고, 경치 좋고, 북악산도 가깝고."

"창작하기 딱 좋은 환경이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점심 먹자."

성북동 아래쪽에 작은 식당을 찾았다.

"성북동 순두부."

들어가니 소박한 동네 식당이었다.


"순두부찌개 네 개요."

주인은 70대 할머니였다.

"여기서 오래 하셨어요?"

"40년 했지."

"40년이면... 1980년대부터시네요."

"그렇지. 그때는 성북동이 지금이랑 많이 달랐어."

"어떻게요?"

"더 조용했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고. 김환기 화백도 여기 살았어."


"김환기 화백도요?"

"응. 저 위쪽에. 근데 돌아가셨고, 집도 없어졌어."

"아쉽네요."

"많이 변했어. 옛날 한옥들은 많이 사라지고, 새 집들이 들어왔어."

"할머니는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그럼. 어디 가겠어. 여기가 내 집인데."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한 곳을 더 갔다.

"길상사. 절."

성북동 끝자락에 있는 절이었다.

"원래 요정이었는데 절이 된 곳이래."

"요정?"

"응. '대원각'이라는 유명한 요정. 근데 주인이 법정 스님께 시주해서 절이 됐어."


길상사로 들어가니 고요했다. 도심 속 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

법당에 참배하고 경내를 걸었다.


단풍이 아름다웠다. 11월 끝자락이라 절정이었다.

"예쁘다."

한 정자에 앉아 단풍을 봤다.

"성북동은 특별하네."

"응. 다른 곳들이랑 완전 달라."

"을지로는 산업, 해방촌은 전쟁, 창신동은 노동, 청담동은 소비. 근데 성북동은..."

"예술과 문화?"

"그리고 시간."

서연이가 말했다.


"시간?"

"응. 여기는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아. 아니, 시간이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만해 선생님의 심우장, 이태준 작가의 수연산방. 80년 전 모습 그대로."

"그게 성북동의 특별함인 것 같아."

저녁이 되어 성북동을 떠났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며 창밖을 봤다.

해질녘 성북동은 더 아름다웠다. 석양에 물든 한옥들,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불빛들.

"다시 오고 싶다."

"응. 봄에 다시 오자. 벚꽃 필 때."

집에 도착해서 민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서울 성북동, 시간이 머문 숨은 골목길'.

"성북동은 서울의 숨은 보석이다. 북악산 자락, 조용한 골목길 사이로 시간이 머물러 있다."

"1930년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한용운, 이태준, 김광섭, 김환기. 조용하고 경치 좋은 이곳에서 그들은 창작했다."

"만해의 심우장은 여전히 북향으로 서 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지어진 그 집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방향을 향한다."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아름다운 정원을 간직하고 있다. 연못, 정자, 나무들. 작가가 직접 가꾼 그 정원은 여전히 고요하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개발로 밀려나는 것들에 대한 시였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났지만, 성북동은 여전히 변화와 보존 사이에서 고민한다."



"40년 식당을 운영한 할머니가 말했다. '많이 변했어.

옛날 한옥들은 사라지고, 새 집들이 들어왔어.'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성북동은 모순이다. 부자 동네이지만 예술의 마을이고, 현대적이지만 전통을 간직하고 있고,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성북동만의 매력이 탄생한다. 시간이 머문 골목길. 예술가들의 혼이 남아 있는 공간."

글을 다 쓰고 서연이의 글과 함께 블로그에 올렸다.

서연이는 '성북동 비둘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를 썼다.


"2024년 성북동 비둘기는/ 고급 주택과 한옥 사이를 날고/ 예술과 자본 사이를 날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난다/ 그리고 묻는다/ 어디에 앉아야 하냐고."

두 글은 많은 반응을 얻었다.


"성북동 몰랐는데 가보고 싶어요."

"예술가들의 마을이었다니 의미 깊네요."

"딸의 시가 인상적이에요."

한 달 후, 성북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성북동 문화유산 보존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자문해주실 수 있나요?"

민수는 수락했다.

6개월 동안 성북동을 샅샅이 조사했다.

남아 있는 예술가들의 집, 사라진 집들의 위치, 옛 사진들, 증언들.


그리고 『성북동 예술가 지도』를 만들었다.

지도에는 30여 명의 예술가들이 살았던 집의 위치와 그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출판 기념회가 심우장에서 열렸다.


"만해 선생님도 기뻐하실 것 같아요."

성북동 주민들이 참석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동네 역사를 기록해주셔서."

"이 기록이 성북동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성북동은 계속 변한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옛 한옥이 사라지고 새 집이 들어서지만, 심우장과 수연산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예술가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그들의 혼은 골목에 남아 있다.

민수와 서연이의 아카이빙도 한 해를 마감한다.

1년 동안 서울과 근교를 누비며 30개의 골목을 기록했다.

"올해 잘 마무리했네."

"응. 내년에도 계속하자."

"어디를 갈까?"

"더 깊이. 그리고 더 넓게."

성북동의 밤은 고요하다.


북악산 아래, 오래된 골목 사이로 시간이 흐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예술가들이 꿈꾸었던 것처럼.

시간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