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88ㅣ

잃어버린 평화 [5]

by seungbum lee


백정치는 언제나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걸치고 다녔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꿰뚫으려는 얄미운 계산이 숨어 있었다. 필요할 때면 두 손을 공손히 비비며 또박또박 이산갑을 산감님이라 불렀고, 때로는 지나치게 낮은 자세로 아첨을 늘어놓았다.

이산갑은 그런 백정치의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실 정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남달랐다. 언뜻 보면 누구에게나 싹싹한 호인(好人) 같았으나, 이산갑은 그 눈웃음 너머에 깔린 계산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산감님, 오늘은 어느 쪽 산비탈을 도실 예정이신지요?"
백정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공손하게 물었다.
"오늘은 북쪽 능선으로 갈 생각이야. 요즘 그쪽에 멧돼지 흔적이 자주 보여서 말이지."
이산갑이 대답하자, 백정치는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역시 산감님이십니다! 산짐승 기운도 피해가질 못하는 촉이시죠!"이산갑은 피식 웃었다. 백정치의 으름장 섞인 아부가 사뭇 익살맞게 들리기도 했다. 산은 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산을 오르는 이들의 마음은 매일 달랐다. 그리고 그런 산 위에서 두 남자는 서로의 속셈을 감추고 오늘도 걷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산길은 안개가 옅게 깔려 있었다. 발밑에 부드럽게 깔린 낙엽 위로 두 남자의 그림자가 나란히 이어졌다. 한동안 묵묵히 걷던 이산갑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정치, 너 이번에 내리는 산중 나무 숫자 제대로 적었지?"
이산갑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그 안엔 무게가 느껴졌다. 백정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가에 다시 익숙한 미소를 걸었다.
"산감님이 맡기신 일, 빈틈없이 잘했습니다. 혹시라도 빠뜨린 게 있다면, 한밤중에라도 다시 오르겠습니다."이산갑은 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실수는 하면 안 되니까. 이 산에 얽힌 것도, 사람에 얽힌 것도 모두 숫자를 맞춰야 하는 법이지."두 사람 사이에 잠시 바람이 스쳤다.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가 울었다. 백정치는 그 소리를 듣고 괜히 기지개를 켰다."산감님, 오늘은 다 같이 운수 좋은 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산갑이 빙그레 웃으며 산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두 사내의 발걸음은 어느새 한결 가벼워진 듯, 안갯속으로 흩어져 갔다

백정치에게 일을 맡기고 이산갑은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산갑을 ‘참되고 현명한 관리’라 부르며 아낌없는 존경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백정치는 속으로 알 수 없는 냉기가 스며드는 걸 느꼈다. 겉으로는 여느 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만은 얼어붙은 채 흔들렸다.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이 조부를 향할수록, 백정치는 자신이 점점 더 좁은 그림자 속에 갇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부처럼 살 수 없다는 절망, 늘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한다는 무력함―그 모든 감정이 백정치의 손끝에 모여들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입술로는 꺼낼 수 없는 질투와 좌절, 그 쓴맛은 손끝을 파고들어 붉은 자국으로 남았다.

백정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이른 아침 산등성이를 오르는 이산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존재가 그 산 등줄기 어디쯤에라도 닿을 수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백정치와 조부는 원래 남남이 아니었다. 어릴 적엔 함께 들판을 뛰놀았고, 장독대 뒤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조부님의 집안에 머슴으로 들어왔고, 그것이 모든 경계의 시작이었다. 나이는 서너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지만, 세월은 그 차이를 점점 더 깊은 골로 벌려 놓았다.


그래서일까. 백정치는 마음 한편에 이산갑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쉽게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기억은 희미해졌고, 세월 속에서 점점 멀어진 마음의 거리는 결국 용서하지 못할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조부처럼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차이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같기도 했지만, 백정치는 그 운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점점 더 괴로워졌다.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속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자꾸만 부풀어 올랐다.‘내가 아무리 애써도, 결국 당신과 다른 길을 걸을 뿐이야.’ 백정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마음 깊이 감춰왔던 고통과 분노가, 이제는 더는 숨기기 어렵게 그의 심장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정치는 조부를 만날 때마다 겉으로는 언제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말을 건넸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조부를 극진히 대하는 척했다. 그의 마음과는 달리 다른 이들에게는 위선을 감추며, 조부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모습에 숨겨진 질투와 자책이 공존하는 삶을 이어갔다.

조부가 성실하게 밭을 일구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백정치의 손끝은 어느새 입가로 가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렇게 입술을 꾹 다문 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나는… 왜 저렇게 못 살까…”

조부처럼 부지런하지도 못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존재도 아니었다. 자신은 늘 남의 뒤를 쫓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처지였다.

백정치는 누구보다 조부를 가까이서 보며 자라났다. 어린 시절, 같은 지붕 아래서 잠을 자고 밥을 먹었지만, 그 거리는 세월이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그의 아버지는 머슴이었고, 그는 머슴의 아들이었다. 나이는 서너 살 어렸지만, 조부는 늘 어른이었고, 자신은 그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 사실이 백정치의 가슴 어딘가를 늘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백정치는 조부를 만나면 겉으로는 언제나 친절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조부를 극진히 대하는 척했다.

""항상 저희를 위해 여러 가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 보내주신 땔감 한 차도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 백정치는 영혼 없는 말을 조부님에게 했다. 그의 목소리는 공허했지만, 조부에게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백정치의 말 한마디에 조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조부는 그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백정치의 얼굴에는 나쁜 감정이 억제된 듯 보였고, 그 이면에는 조부에 대한 질투가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는 것이 명백했다. 조부는 영혼 없는 인사의 뒤에 숨어 있는 속마음을 간파하고 싶었지만,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의심은 그저 꾹 눌러 담았다. "고맙게 잘 쓰시길 바랍니다, " 조부가 답하며 백정치의 눈을 바라보았다.


백정치는 조부의 정중한 대답에 잠시 자신이 그를 극진히 대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조부의 따뜻한 시선은 그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느껴졌다. 그는 조부처럼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마음을 괴롭혔다.


그러나 겉으로는 떳떳한 표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여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요즘은 날씨가 추워져서 농사일이 힘들군요, " 백정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며 조부와의 알맹이 없는 대화 속에서 자신의 감정의 갈등을 숨기고 있었다 항상 저희를 위해 여러 가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 보내주신 땔감 한차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백정치는 영혼 없는 말을 조부님에게 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반란(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