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평화 [8]
산등성이를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이산갑의 눈에 낯선 기운이 들어왔다. 마을 위로 검붉은 연기가 굵은 기둥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순간 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불이다!
짙은 연기 속에서 타 들어가는 나무 냄새와, 바람에 실려 오는 매캐한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귀에는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고함과 뒤엉킨 소란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산갑의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온몸을 쥐어짜듯 힘을 모아 발길을 재촉했다. 풀숲을 헤치고, 돌길을 내리 달리며, 그저 한 걸음이라도 빨리 마을로 닿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무사해야 한다. 제발 모두 무사해야 한다. 이산갑은 발길을 재촉하며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아래 돌멩이들이 굴러 떨어지고,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나뭇가지들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듯 흔들렸다. 길은 이리저리 휘어져 있었고, 발목까지 쑥 빠지는 진흙이 그의 속도를 방해했다. 작은 돌멩이와 잡초가 길을 더욱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 그가 달려갈수록 연기는 더 짙어지고, 불길의 날카로운 타닥거림 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그의 발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논두렁길이 지금은 좁디좁은 길로 보여 달리기가 많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달리기를 멈출 수없었다.
"아아! 어찌하여 학당에 불이 난 것인가! 불길은 마침 불어닥친 바람을 타고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우물을 오가며 물을 퍼 날랐지만, 불길은 잡힐 줄 몰랐다 마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개울과 우물을 오가며 물을 퍼 날랐지만, 불길은 잡힐 줄 몰랐다
이산갑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지붕으로 올라가 타오르는 볏짚을 낫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아! 그토록 애써 세운 학당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생각하며 낫질에 매달렸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불길이 조금씩 잡혀갔다. 땀으로 온몸이 축축한 이산갑은 그제야 겨우 긴장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산갑이 다 무너져 버린 잿더미에서 무언가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다.. "그래, 변두리 세 번째 기둥이었어. 맞아!" 그는 주춧돌만 남은 화재 현장에서 그 주춧돌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불타버린 학당터. 붕괴된 기둥의 잔해들 사이를 이산갑은 무겁게 걸어 들어갔다. 재와 먼지로 얼룩진 얼굴에는 땀이 뒤섞였고, 그의 눈은 무언가를 찾는 듯 초점 잃지 않았다. 이산갑은 혼잣말을 되뇌며 불에 그을린 돌무더기 사이로 몸을 낮췄다. 겨우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주춧돌 아래, 손으로 잿더미를 헤치기 시작잠시 후, 무너진 돌 틈 사이로 작은 주머니 하나가 그의 손끝에 닿았다
그 안에는 그날 윤서영과 함께 묻었던 서약문, 그리고 서로를 기억하자며 끼워두었던 한 쌍의 반지가 조심스럽게 드러났다. 반지는 그을음에 얼룩졌지만, 그 안에 담긴 기억은 너무도 선명했다. 그날의 따스한 햇살, 윤서영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손을 맞잡고 함께 내뱉었던 약속이산갑의 손이 떨렸다. 그는 반지를 쥔 손을 가슴에 대고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불길마저 앗아가지 못한 기억. 이것이 자신을 다시 일으킬 힘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이것이 그를 다시 일으킬 힘이 되리라는 걸 그는 알았다. 이산갑은 그 작은 주머니를 소중히 들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