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보는 소리의 세상

by 인생서점 북씨

한밤중, 수선스러운 쿠키의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떴다.

낑낑대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이 빨라졌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 빨리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신호였다.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쿠키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열자 한 김 쉬어간 여름의 끄트머리에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고요가 짙게 깔린 여백의 시간, 풀벌레의 격렬한 울음은

마치 먼 기억 속의 문을 열어젖히는 듯 몇 해를 건너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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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 베란다를 열면 북한산 인수봉이,

뒷 주방창문 에 서면 도봉산 자운봉이 한눈에 들어오던, 산 밑 아파트에서 살았다.

여름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더운 공기를 뚫고 화단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마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러나 양주로 이사 온 뒤, 그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이 탓인가 싶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청력이 약해져 고주파음을 놓친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는 풀벌레 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싶어 괜스레 초라해졌다.

어느 날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시골로 이사와서 부터는, 풀벌레 소리가 전혀 안 들리네.”

그러자 딸이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엄마, 나도 풀벌레 소리가 안 들리던데? 시골인데도 풀벌레가 없는 것 같아.”

나는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풀밭이 무성한데 풀벌레가 없다니. 하지만 딸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제초제를 뿌려대는

농촌의 환경 탓일지도 모른다.

불과 이 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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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터오자 풀벌레 소리는 긴 여운을 남기며 점점 잦아들었다.

쿠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 소리에 민감해졌다.

쿠키가 두 살이 될 무렵, 집 밖에 살던 길고양이 가족 네 마리를 한꺼번에 들인 적이 있다.

갑작스레 길고양이 식구가 늘어나자 쿠키는 집 안 화장실을 쓰지 않았다.

다른 냥이들 눈치를 보며 낑낑대고 내 곁을 맴돌다가 다급하게 움직일 때서야

나는 쿠키의 이상 행동을 알아차렸다.

어느 날은 이층 화장실로 데려가려는데 다른 냥이들이 우르르 따라왔다.

순간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고, 녀석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그제야 쿠키는 내가 곁을 지켜주자 안심하며 조심스레 모래 위에 발을 내딛었다.

스크린샷_18-9-2025_173215_chatgpt.com.jpeg 마당에서 놀고 있는 우리 냥이들 사진을 AI를 이용해 만화로 변환해 봤다

고양이에게 화장실은 단순한 배설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은밀한 공간이자,

자존심을 걸고 지켜야 할 성역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았다.

쿠키는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을 마음으로 들었다,

다른 냥이들의 발자국 소리와 기척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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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견사에서 개 짖는 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동네 길고양이가 밥터에 내려왔다는 신호였고,

쿠키에게는 위험이 다가온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도 쿠키는 개들의 짖음을 통해 상황을 읽어냈다.

나는 쿠키가 걱정돼 밖으로 나갔다. 동쪽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고,

차밑에 숨어 있던 쿠키는 창문이 열리자 쏜살같이 대문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풀벌레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버릴 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리도, 동네에서 흘러드는 온갖 소리에 나는 오늘도 귀를 기울인다.

소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존재가 남기는 흔적이며 세상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풀벌레 소리가 계절을 불러내듯, 쿠키에게는 모든 소리가

그의 안식과 불안을 가르는 경계였다.

소리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삶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울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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