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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18. 2022

실수(實數)와 실수(失手)3

#1:2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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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목적 달성의 여부만이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큰 실패 혹은 큰 잘못이라 부를만한 일은 사실 한순간에 결정되지 않는다. 작은 실수가 반복되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 그 누적의 서사가 큰 실패를 불러일으킨다. 마주하지 않았던 진실, 회피했던 그날, 용기의 결여, 성찰의 부재 등이 궁극적 실패를 낳는다. 이러한 오만과 비겁함이 진짜 실패다. 이런 실패는 가끔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실패이기도 하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반복적인 실수는 어쩌면 우리 삶의 본질일 수 있다. 이를 빨리 깨닫고, 본인의 실수나 실패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자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나태하고, 무지하며, 오만하고, 비겁하다. 그래서 가끔은 작은 실수를 외면하게 되고, 이것이 누적되어 큰 실패가 된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비롯해 나의 세계에 오류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틀리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옳았을 때의 기쁨보다 틀렸을 때의 스트레스와 불안에 더 크게 좌우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과오를 알아차렸음에도 애써 외면하곤 한다. 그 불안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나 또한 돌이켜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고, 비겁하게 외면했던가!)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고, 대척점에 있는 듯하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위가 성공과 실패 두 가지로만 귀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실패가 누적되면 우리 삶 자체가 실패한 삶이 되는 것 같고, 나라는 사람이 실패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는 이 상실과 실패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우리가 더 큰 실패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눈앞에 보이는 출구로 나가면 빛이 있고, 긴 터널이 끝날 것 같지만 막상 닥치는 것은 더 큰 어둠이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처럼.


 나의 실패로부터의 회피 혹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그저 고집부리다 망신당하는 단순한 에피소드로 끝나면 다행지만 때로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피타고라스가 히파소스를 죽인 것처럼. 가끔, 아니 종종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우리 주변의 참사처럼. 우리는 때로 진실을 외치는 우리 안의 히파소스를 죽이고, 애정 어린 쓴소리를 해주는 우리 주변의 히파소스를 죽인다. 경미한 실수들이 나타나지만 우리는 이를 별 것 아니라며 무시한다. 내면의 불안을 외면한다. 이는 곧 무시하기 힘든 상처가 되어 우리에게 경고를 하곤 한다. 그럼에도 이를 회피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 삶에 대형사고가 발생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낳을지 모른다.


 돌이킬 수 없는 실패는 나를 평생 괴롭히는 후회로 남는다. 최악의 경우 내가 사랑하는 주변인까지 상처를 입는다. 이러한 후회는 다짐으로 진화할 수 없다. 내가 나를 미워해야 하는 평생의 이유가 된다. 조금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평생 나를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순간의 비겁함이 나의 그림자에 스며든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우리의 양심을 찌른다. 내면의 어둠을 감추고 싶은 마음에 큰소리 쳐보지만 그저 으르렁 짖어대는 것에 불과하다. 히파소스를 향해 쏜 화살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꽂히게 돼 있다.


 이렇듯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의 실수 혹은 실패를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상처 입기 전에. 나 스스로를 상처 입히기 전에. 고집, 아집, 집착이 후회와 무기력이라는 파도를 만들어 그것에 휩쓸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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