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당이 300 ~ 400 불!?: 무한 경쟁 사회? 무한 경쟁 개인
#무한 경쟁 사회? 무한 경쟁 개인!
그곳에서 일을 관두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상쾌했다. 한 푼이라도 버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을 테지만 노동 강도에 비해 임금이 너무 열약했다. 그리고 이는 스트레스로 직결 됐다. 레몬을 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농장주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 마을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시기가 고작 2~3개월뿐이었다. 그 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불안감이 커져왔다. 잠시 바람이나 쐴 겸 같이 사는 사람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예쁜 경치를 바라보며 고기를 먹는 행위는 역시 즐거웠다. 하지만 그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매번 농장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초조함을 부추겼다.
하루는 대박 농장 중 한 곳을 다시 들렀다. 농장에 사람이 없어서 계속해서 “Excuse me”를 외쳤다. 그렇게 농장 직원을 찾다가 안에 있는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사무실에도 아무 사람이 없었다. 사무실 책상에 여러 서류가 보였다. 대부분이 워홀러들의 이력서였다. 우리 이력서도 저 중에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 화이트보드가 눈에 띄었다. 화이트보드에 무언가 익숙한 것이 쓰여 있었다. 나와 형의 영어이름과 연락처였다. 그리고 화이트보드에는 큰 글씨로 ‘Contact list’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지원자들의 것은 없고, 오로지 형과 내 이름만 있었다. 우리는 곧 이 농장에서 연락이 오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다시 그 농장을 찾아갔지만 ‘곧 연락을 줄게’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다른 농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을에는 워홀러들이 정말 많았다. 워홀러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많은 듯했다. 그리고 그 대다수는 한국인이었다. 마을에는 한국사람들이 정말 넘쳐났다. 확실한 통계는 아니겠지만 내가 체감한 바로는 그 마을 현지인보다 한국 워홀러가 더 많았다. 그 마을은 호주의 대표적인 식료품 마트인 울 월쓰(Woolworths)와 콜스(Coles)도 없었다. 말 그대로 시골이었다. 그럼에도 한인 마트가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심지어 그 한인 마트에서 한국 스타일의 프라이드치킨도 팔았다. 그리고 한국인 맞춤 상품인 1시간 와이파이 사용료도 받았다. 아마 그 지역만 관리하는 대통령과 여당이 있었다면 오로지 한국인만 위하는 정책을 펼쳤을 것 같았다. 일을 못 구한 초조함 때문이었는지 한국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A라는 지역에서 황금이 발견 됐다는 소문이 들리면 순식간에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티브이, 인터넷, 스마트폰이 없어도 사람들은 돈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다. 이미 정보가 넘칠 대로 넘치는 시대에 귤밭이 금밭이라는 정보를 나만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루는 한국사람들이 축구하는 곳에 참여했다. 오랜만에 축구가 하고 싶었고, 그들로부터 일자리 정보도 얻을 목적이었다.
축구를 마치고 앉아서 쉬고 있었다. 이미 친해진 한국인들은 수다를 떨면서 휴식을 취했다. 대부분 하루에 얼마를 벌었고, 만다린 몇 상자를 채웠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 수다 너머로 익숙한 농장 이름이 들렸다. 이 동네 최고의 대박 농장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와 형의 이름이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던 그 농장이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정보를 얻고자 말을 걸었다.
그분은 그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됐었다. 나보다 늦게 왔다. 그럼에도 그 대박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언제 시작했는지 물어봤더니 그 또한 얼마 안 됐었다. 심지어 나와 형의 이름이 화이트보드에 적혀있는 것을 확인한 날보다 늦었다.
“그 농장 직원 뽑아요? 안 뽑는 것 아니었어요?”
“뽑더라고요”
“뭐 이력서나 연락처 남기고 갔더니 연락이 왔나요?”
“아니요. 농장 앞에서 텐트 치면서 죽치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마을에 오자 마자 그 농장 입구에 텐트를 치며 지냈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한국 사람들은 대박 농장이라는 곳의 입구에 텐트를 치며 지냈다. 그중 무리를 이룬 채로 그 마을에 온 뒤 각자 뿔뿔이 흩어져 대박농장의 입구에서 ‘죽치며’ 앉아 있었다. 텐트를 설치해 그곳에서 자는 것도 불사했다. 그러다가 농장주가 채용을 하면 무리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인들을 계속 연결하며 대박 농장 내 나름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농장주 입장에선 한, 두 명만 채용하면 그 후의 직원은 알아서 데려오니 편했을 터였다. 따로 이력서 관리를 할 필요도 없고, 면접을 볼 필요도 없고, 일일이 연락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한국 워홀러들은 단순히 근로자일 뿐만 아니라 인사관리까지 해 주었다. 게다가 어차피 단순 노동인데 그 사람의 이력이나 면접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몸만 튼튼하면 될 터였다. 설사 그 단순노동을 못하는 직원이 들어와도 상관없었다. 일한 만큼 받아가는 곳이니 농장의 스케줄에 크게 영향이 없는 이상 일 못하는 직원 하나의 무능력함은 큰 문제가 안 됐다.
다른 대박 농장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들한테도 말을 걸어 물어봤다. 그들도 방법만 다르지 농장 앞에서 눌러앉은 사람들이었다. 혹은 지인을 통해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농장 앞에 차를 대고 하루 종일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새벽부터 에이전시에 가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온 사람들도 있었다. 텐트를 치고, 그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살기도 했다. ‘어차피 돈만 벌어 가면 된다’라는 태도로 그들은 채용을 위한 온갖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들의 간절함과 열정이 나보다 훨씬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시 나는 한국 사람들의 행동에 조금의 염증을 느꼈다. 남의 농장 앞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모습이 무책임해 보였다. 나 역시 한국을 대표한다는 마음 따위는 없었다. 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국격을 떨어뜨리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해 들은 일련의 모습들을 상상하니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배가 아팠다. 눈앞에서 내 황금이 뺏긴 것 같았다.
그날 축구장에서 들은 소식을 사촌 형에게 이야기했다. 형도 한국인들의 징글징글한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형과 대화를 하고 나니 불쾌함과 질투보다는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형, 나 다시 퍼스(Pearth)로 갈래”
결단처럼 내뱉는 말에는 사실 체념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대박 농장'의 일자리를 얻기엔 나의 간절함은 부족했던 것 아닐까? 개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뻣뻣했던 것 아닐까? 나도 한몫 단단히 챙기고 싶은 욕심에 이 마을에 왔으면서 누굴 욕할 수 있겠어. 골드러시 때 이민자들이 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에 비하면야. 텐트 치는 것 따위는 양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