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 공장에 이력서를 넣자마자 연락이 왔다.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 닭고기 공장은 워홀러들 사이에서 '대박 공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맡은 일은 거의 '쪽박'에 가까웠다.
공장은 마트에 닭고기를 납품하는 회사였다. 워홀러들이 주로 하는 일은 청소, 닭고기 포장, 상품 출하, 그리고 닭고기 해체였다. 이 중에서 닭고기 해체 작업은 성과급제였고, 나머지 일들은 시급제로 운영됐다. 시급은 서호주 법정 최저임금보다 적었지만, 그 공장이 대박 공장으로 불린 이유는 해체 작업이 꽤나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첫 출근 날, 나는 전화로만 통화했던 공장의 인사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녀는 중년의 호주인이었다. 그녀는 한 중국 직원을 내게 소개해 줬다. 그 중국 직원의 안내에 따라 공장을 둘러봤다. 공장 근로자들은 대부분 아시아인이었다. 특히 중화권 사람들이 많았고, 해체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나는 닭고기 해체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 포지션은 이미 자리가 다 찼다고 했다. 대신 내가 맡게 된 일은 청소와 닭고기 포장이었다. 포장 작업은 닭가슴살 4개씩을 한 봉지에 담아 포장하는 것이었는데, 포장 기계가 있어서 일이 비교적 수월했다. 하지만 그만큼 하루 종일 서서 단순한 노동을 해야 했다. 대략 7~8시간 동안 계속해서 닭가슴살 4개를 봉지에 넣고 기계에 투입하는 일을 반복했다.
저녁이 되면 청소 담당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했다. 호주는 '저녁이 있는 삶'을 중시하는 나라라 퇴근 시간이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세척이 끝난 닭고기가 가득 담긴 상자들이 공장 한쪽에 쌓여 있었다. 상자에 빼곡히 담긴 닭들을 보니 백숙이 떠올랐다. 해체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상자에서 닭을 꺼내 부위별로 해체하는 작업을 하루 종일 했다. 상자 하나를 해체할 때마다 성과급이 지불됐고, 그들은 상자 하나를 마칠 때마다 화이트보드에 자신의 이름 옆에 획을 그었다. 능숙한 사람은 하루에 4~5 상자씩 처리했다.
공장 안에서는 클럽에서 틀 법한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작업장 곳곳에 강렬한 비트가 가득 찼고, 그 안에서 닭고기 해체 작업이 한창이었다. 작업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닭을 들었다가 칼을 내려쳤다. 칼이 닭의 뼈와 살을 가르고, 도마 위에 쌓인 부스러기들이 흩어졌다. 그들의 손놀림은 지극히 반복적이었고, 동작 하나하나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마는 닭에서 떨어져 나간 뼈와 살로 가득 찼고, 그 위에는 어느덧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그 피는 도마 가장자리를 넘나들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 역시 닭의 핏물이 스며들며 끈적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마치 이 모든 혼란이 익숙한 것처럼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다. 도마 위에 닭 피를 비롯한 찌꺼기가 너무 많아질 때면 호스로 물을 한 번 뿌렸다. 그와 동시에 그중 한 명이 크게 소리를 외쳤다. 잇따라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환호성을 했다. 마치 콘서트나 페스티벌 현장에서 내뱉을 법한 소리였다. 그들은 그 단순하면서도 잔인한 작업의 노고를 환호성으로 달래며 일을 했다. 노동요는 닭고기 해체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해 보였다.
그 장면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기이하게 느껴졌다. 신나는 음악, 둔탁한 칼질, 그리고 피가 흥건하게 고인 도마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는 그들의 손놀림, 작업대에서 미끄러지는 닭고기, 화이트보드에 늘어가는 획수, 작업의 마디마디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 찰리 채플린 영화인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 같았다.
해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퇴근한 후에도 나는 3~4시간 더 일해야 했다. 육가공 업체인 만큼 위생이 중요해서 청소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문제는 내가 이렇게 10~12시간을 일해도 임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체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닭고기 두 상자만 처리해도 내 하루 임금보다 더 많이 벌었다. 그들은 오전에만 두 상자를 끝낼 정도였다.
라비의 집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홍콩 출신의 룸메이트가 생겼다. 그는 라비와 이미 친분이 있던 친구였다. 내가 라비 집에 들어갔을 때 라비가 미리 언질 해 준 그 친구였다. 때 마침 닭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친구에게 일을 제안했다. 홍콩 친구는 흔쾌히 승낙했고, 다음 날부터 나와 함께 출근했다.
홍콩 룸메이트와 어울리다 보니 공장 내에서도 주로 중화권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공장 내 일부 한국인들이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나도 몇몇 직원들은 그들이 말하기 전까지 국적을 알기 힘든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중화권 사람으로 오해 받든 말든 별로 상관없었다. 그리고 호주에 있는 만큼은 웬만하면 주로 외국인들과 어울려 지내려고 했으므로 내 국적의 오해는 적절한 방패 막이였다.
하지만 해체 라인에서 일을 하려면 그들과 친해져야 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해체 라인을 한국 사람들이 다 잡고 있었다. 그들은 빈자리가 날 때쯤이면 미리미리 자신들의 지인들을 그 자리에 꽂아 줬다. 그렇게 그곳도 카르텔이 단단히 형성된 듯 보였다. 나도 그 사람들과 친해져서 빈자리를 노려야 했다. 하지만 친해져야 할 과정을 생각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해체 라인에서 일하는 한국인 대부분들이 담배를 피웠다. 그날도 ‘시발’이라는 익숙하고, 친숙한 욕이 휴게실을 메우고 있었다. 그중 덩치가 크고 유독 욕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공장에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시발’이라는 한국 욕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K-Slang의 선도자였다. 큰 덩치에 팔에는 문신이 가득했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시발이라는 욕설과 니코틴 연기와 자신의 체액을 적절히 섞어 바닥에 뱉어댔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홍콩 룸메이트와 같이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맞춰 공장 근로자들은 나와 간식을 먹거나 담배를 폈다. 먼발치 해체 라인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들이 보였다. 저마다 엄청난 작업량과 반나절만에 벌어들인 수입에 대해 기염을 토해내기 바빴다.
쉬는 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고, 직원들은 하나 둘 휴게실을 나갔다. 나도 다시 작업복의 매무새를 다듬고 공장으로 휴게실을 나서려 했다.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K-Slang 선도자가 아직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 홍콩 룸메이트가 다른 홍콩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먼저 그 앞을 지나갔다. 나는 뒷따라 가는 도중 그와 눈이 마주쳤다. K-Slang 선도자는 내가 한국인인 줄 모르는 듯했다. 한국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본다고 하지만 사실 이렇게 많은 아시아인이 섞인 곳에서는 헷갈릴 법도 하다. 1초도 안 되는 눈 마주침을 무시하고 나는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내 뒤통수를 강타하는 말이 들려왔다.
"이 병신 짱깨 새끼들 좆뱅이 쳐봤자 얼마 못 벌어."
그곳에도 계급은 존재했다. 다만 그 계급은 공장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해체라인에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한 한국인들은 그들이 공장 내에서 상위 계급을 차지한다고 착각했나 보다.
돈을 더 번다고 한들 닭을 도륙하는 일에 무슨 자부심을 느낀단 말인가? 옛날이었으면 그냥 백정 아닌가? 타지에서 같이 고생하는 처지에 그딴 말을 내뱉는 게 이해 안 됐다.
나는 애써 못 알아들은척하며 작업장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