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룸메이트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원서를 넣었던 가구 공장이었다. 호주에서 1년 넘게 일했고, 진진에서 일을 마칠 때 받은 레퍼런스 덕에 일자리 구하기가 수월했다. 통화하며 출근 날짜를 맞췄다. 홍콩 룸메이트에겐 이번주까지만 이곳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일을 못 구했을 때 누군가 날 꽂아주길 바랐는데 어느새 내가 홍콩 룸메이트를 닭고기 공장에 꽂아준 샘이 됐다.
가구 공장에 출근하는 첫날이었다. 공장은 외관상으로 그저 커다란 창고 같았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허리 높이의 선반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선반 위에는 다양한 형태의 나무판자가 놓여 있었다. 직원들은 나무판자를 가공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공장 내부는 각종 기계가 내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윙하며 울리는 각종의 기계들은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다량의 먼지를 뿜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톱밥들이 공중에 나풀거렸다. 나풀거리던 톱밥들은 작업대와 바닥을 가득 채웠다. 작업자들의 옷과 머리에도 톱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첫날인 만큼 나는 기계를 다루지 않았다. 주로 나무 원판을 작업자들한테 날라주거나 기타 가구 부품을 옮겼다. 작업이 끝난 나무 들을 다시 조립라인이나 도색라인으로 옮겼다.
정신없이 물건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퇴근할 때가 되었다. 퇴근 준비를 하던 중, 벽면 너머 다른 공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엔 한국인 특유의 영어 억양이 묻어 있었다.
벽을 돌아가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진진의 닭농장에서 일할 때 나와 함께 방을 썼던 동생이었다. 둘 다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눴다. 동생은 나보다 일주일 먼저 와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 후로도 가구 공장 일은 특별히 힘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톱밥 속에서 일하다 보니 기관지가 걱정 됐지만, 마스크를 쓰고 며칠 일 해보니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공장에서 맡은 내 주된 일은 가구 부품의 마무리 작업이었다. 직사각형 나무 패널을 대만 선배들이 잘 다듬고 나면 나는 마무리 작업을 했다. 주로 사포질이었다. 사포질을 하며 가구 부품의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어야 했다. 나무 결이 거친 곳이 없도록 꼼꼼하게 다듬어야 했다. 선반에 1차 가공이 끝난 나무판자를 올려놓고 열심히 문질렀다. 30분만 지나도 머리와 작업복은 톱밥 범벅이 됐다.
물건을 옮기거나 간단한 조립도 했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작업복과 머리카락은 톱밥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일은 재밌었다.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내 손으로 나무를 다듬어 가구를 만드는 일은 제법 적성에 맞았다. 더욱이 시급도 높은 편이었다.
가구를 만드는 일은 세심함을 요구했다. 그래서 섬세한 작업은 주로 숙련된 작업자들이 맡았다. 공장에는 대만 출신 노동자들이 2~3명 있었다. 그들 모두 나처럼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왔다가 스폰서 비자를 받아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실했다. 일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곳에 뼈를 묻을 작정인 듯했다.
그들 중 한 명이 특히 인상이 좋았다. 그는 내게 일하는 요령과 기술을 친절하게 알려주곤 했다. 덕분에 일하는 법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나를 유독 괴롭히는 대만 친구도 있었다.
그는 내 사포질이 끝나면 검사를 했다. 사포질이 덜 된 곳, 과하게 된 곳 등을 내게 일러주었다. 그 일러주는 과정에서 그의 짜증과 불평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나도 배우는 입장이니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짜증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하루는 공장 사장한테 내 작업을 컨펌받았다. 사장은 내 작업물을 마음에 들어 했다. 어느새 일이 제법 손에 익었다. 그때 나를 괴롭히던 대만 친구가 나타나 내 작업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그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친구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이미 사장한테 확인받았고, 사장이 마음에 들어 했다고 말했다. 그의 얼굴이 벌게 지면서 말이 빨라졌다. 나는 그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내 그 친구가 중국어로 말을 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들려오는 한 단어가 있었다. 중국 욕이었다. 진진에서 살 때 대만친구들과 홍콩 친구들로부터 배운 단어였다. 사실 그 단어를 몰라도 중국어로 나를 욕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누구라도 알아챘을 만한 상황이었다. 나도 욕의 다양성으로는 부족하지 않은 우리 고유 언어로 되받아 쳤다. 문제는 그도 한국의 가장 흔한 욕 중 하나인 ‘시발’을 잘 알고 있었다.
모국어로 욕을 한 마디씩 주고받은 두 아시아인은 곧이어 영어로 설전을 시작했다. 나도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이 상황이 조금 웃겨 보였다. 설전이 오갈수록 그는 점점 더 흥분하며 말을 더듬었다. 원어민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내 생각과 감정을 영어로 전달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반면에 그 친구의 영어는 나보다 한참 서툴렀다. 고조된 감정이 언어로 배설되지 않으면 사람이 어떤 얼굴이 되는지 그때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나한테 이상한 말을 외치곤 돌아서 갔다.
“You know what? I have a 482 visa. Your visa is just working holiday.”
(이봐! 나는 482 비자야. 너는 고작 워킹홀리데이 비자고)
482 비자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482 비자가 흔히 말하는 스폰서 비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그 말을 내뱉었는지도 금방 이해했다. 그의 말은 워홀 비자보다 계급이 높은 스폰서 비자 앞에서 까불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작 워홀러인 너 따위 와는 다르다’는 경고이자 협박이었다.
호주에 온 한국 사람들끼리도 급을 나눈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주권자를 비롯한 교민 - 유학생 - 워홀러 순으로 계급이 나뉜다.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유독 타인을 괴롭히는 사회에서 온 한국인들이야 그려려니 했다. 나도 그 저주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테니. 하지만 대만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유교의 영향일지, 한자의 영향일지, 불교의 영향일지. 아시아의 치열한 경쟁문화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계급 상승의 욕구 부추겼고, 이는 조금이라도 계급을 나눠 상대를 누루고 싶은 욕구를 낙인처럼 남겼다.
그 대만 친구가 왜 나를 싫어했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원래 내 자리에 자신이 데려오려고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사정상 한 달 늦게 오게 되어 내가 대신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는 나를 내보내고, 자신의 친구를 이 공장에 데려오고 싶었다.
그가 친구를 꼭 이 공장에 데려오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가구 공장 사장은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 482 비자를 지원해 줬다. 흔히 워홀러들 사이에서 스폰서십 비자라고 부르는 이 비자는 영주권을 딸 수 있는 비자다. 이 비자로 3년 이상 일을 하고, 영어 시험 및 몇몇 행정 요건을 맞추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가구 공장 사장은 정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호주 영주권을 취득하고 싶어 하는 아시아계 이방인들의 욕망을 잘 이용했다.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482 비자를 주며 당사자를 비롯한 주변 근로자들의 근로 의욕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비자를 주고도 중간에 철회하기도 했다.(직접 보진 못했지만 오래 일한 대만친구가 알려주었다) 물론 해당 직원의 근로 태도가 불성실해서였을 수 있다. 하지만 어제까지 함께 482 비자로 일하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하는 공간은 사장을 제외하면 모두 아시아계 근로자였다. 전부 482 비자 아니면 워홀러들이었다. 호주 현지인이 일하는 작업장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원자재를 들여오거나 완성된 가구를 출하하는 일 같았다. 확실한 것은 점심시간 때 만난 호주 백인들의 옷에 톱밥 따위는 묻어 있지 않았다.
하루는 사장이 호주 직원들과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They are just working machine. They would die for permanant residency”
(제네들 그냥 일하는 기계야. 영주권 준다면 죽는시늉이라도 할걸)
교민, 유학생, 워홀러 말고 계급이 하나 더 있었어. 흰 피부의 호주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