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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Oct 19. 2024

한국이 싫어서? 한국인이 싫어서!


 가구 공장을 나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곳은 영어를 사용하기 좋은 일터가 아니야’였다. 사실은 그 가구공장에서 부품 취급당하는 것 같아 관뒀다. 더욱이 그날 이후로 나를 괴롭히던 대만 직원의 잔소리와 핀잔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밤새 게임만 했다. 게임하다 새벽에 잠들어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일어났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게임만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뭘 하든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유학은 물 건너갔다. 그렇다고 당장 한국에 가기는 싫었다. 호주에 1년 넘게 있었는데 모은 돈이 남들보다 적어서 창피했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게임이 주는 당장의 도파민에 나를 맡겼다.


 그러면서도 외로움은 점점 커져갔다. 호주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향수병 따위는 안 걸릴 것이라 호언 장담했다. 심지어 향수병 걸리는 사람들이 이해가 않됐다. 여전히 한국이 많이 그립지는 않았다. 음식을 생각하면 향수의 감정이 조금 올라왔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짓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친구가 보고 싶었다. 단순히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우정이라는 감정 자체가 그리웠다. 호주에 와서 많은 외국인 친구들 사귀었고, 그들과 우정을 나눈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한국인과 한국어로 소통하고, 한국의 정서를 나누는 것이 고팠다.


 호주에 오고 나서 한국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유학원이나 일터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한인들만 가득한 집의 방을 구하거나, 한국인들의 술자리, 한인 교회, 한국인들의 취미 모임 등에 먼저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추억도 쌓았을 수 있다. 하지만 영어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과 영어에 방해될 만큼은 아니게 적당히 거리를 두며 지냈다.


 하지만 호주에 온 지 약 1년 반이 흐른 시점에서 나는 내 원칙을 깨고 한국인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로 했다. 길어진 타지 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쳐 친구가 필요했다.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 ‘퍼참(퍼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접속했다. 친목 게시판에 들어갔다. ‘00년 생 00 띠 모임’이 눈에 띄었다.


 모임에 나가 보니 워홀러뿐만 아니라 영주권자, 영주권자와 결혼한 사람, 유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나와 같은 워홀러였다. 같은 나이 모임인 만큼 처음부터 서로 반말을 했다. 처음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편하게 술잔을 부딪쳤다.


 각자 타국에 와서 고생했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워홀 와서 누가 더 고생했는지 겨루는 것 같았다. 처음엔 각자의 이야기에 공감과 응원이 오갔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말 틈 사이로 불쾌한 언행들이 점점 커져갔다.


 "내 친구들 아직도 공무원 준비 중이야. 난 그냥 여기서 일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야근이 힘들다더라. 여기선 적당히 일하고 퇴근하면 내 시간인데, 그게 더 좋은 거 아니야?"

 "맞아, 한국에서 남들 눈치 보며 사느니, 여기서 내 방식대로 사는 게 훨씬 나아."

 "명문대 나온 내 친구도 맨날 죽는소리해. 난 차라리 호주에서 일하면서 내 삶 즐기는 게 더 현명한 것 같아."

 "한국에서는 정해진 대로만 살아야 하잖아. 난 여기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게 더 나아."


 다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삶을 폄하하는 말을 쏟아냈다. 동시에 자신이 호주에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자랑하기 바빴다. 정해진 길로만 달려야 하는 한국과 비교하며, 이곳 호주의 자유를 찬양했다. 자유의 땅에 발을 내디딘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지 막막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말에는 한국에서 받은 상처와 한국에 대한 미움, 그리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삶을 깎아내리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와 동시에, 호주에서 고생한 모험담에 대한 자부심과 여기서 모은 자산을 자랑하는 마음도 어우러져 있었다.


 ‘근데 영주권 없으면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


 나는 그들이 대부분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라는 생각을 혼자 골똘히 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내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물어봤다. 자연스럽게 진진의 닭농장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내 말을 끊고, 그 친구가 말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역정이 담겨 있었다.


 “야, 그 돈도 안 되는 데서 왜 그렇게 오래 일했어? 세컨드 비자 돈 주고 사면 되잖아.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뭣하러 농장에서 쓸데없이 시간 버려. 돈 많이 벌 수 있는 농장도 아니고. 여기 와서 돈만 벌어가면 되지, 무슨 외국인 친구야. 어차피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워홀 성공 여부는 결국 돈이야.”


 나도 돈 때문에 이곳에 왔다. 가고 싶었던 영화 학교는 너무 비쌌고, 부모님은 내 꿈을 반대했으며,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벌어서 가겠다는 생각으로 호주에 왔다. 구구절절 거창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도 돈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목표들도 있었지만, 솔직히 돈이 충분히 있었다면 굳이 호주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더라도 1년 이상 머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돈에 관심이 있고, 돈 이야기를 하는 게 뭐가 잘못됐겠는가. 그러나 오로지 돈만 이야기하는 또래들을 보니 왠지 서글퍼졌다. 그리고 나도 원했던 그 돈을 목표만큼 못 모았기에 더 뼈아팠다.


 그날 나는 또 하나를 깨달았다. 계급은 단지 영주권자, 시민권자, 계급은 영주권 및 시민권자-유학생-현지인으로만 분류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번 워홀러와 많이 못 번 워홀러로 나누어졌다. 같은 계급 사이에서도 철저히 급을 나누길 바쁜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의 술자리는 결국 워홀러들의 싸움으로 마무리 됐다. 나의 경험을 옹호하는 친구와 자신의 경험을 숭배하기 바쁜 친구가 다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욕설이 오고 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들어 본 적이 없던 맞짱 뜨자는 말이 오갔다. 둘 다 밖으로 나가 맞짱을 뜨지는 않았다. 아니 아무도 밖으로 먼저 나가지 않았다.


 나를 옹호했다고 해서 그 친구에게 딱히 더 고맙진 않았다. 그 친구가 내 입장을 지지해 준다기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바빠 보였다. 돈이 최고라며 워홀 와서 번 돈을 자랑하는 친구도 처음에는 부러웠지만 나중엔 안쓰러웠다. 그도 호주에서의 생활은 돈 번 것 이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둘 다 안쓰러웠다. 정확히는 호주에 와서까지 무한경쟁으로 인해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 세대가 애처로웠다. 조국의 저주는 먼 이국땅에서도 그 힘을 발휘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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