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에서 한창을 무기력하게 게임만 하면서 보내던 날이었다. 우연히 번버리 근처에 있는 감자, 당근 농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퍼스의 한 공장에서도 연락이 왔다. 광석을 가공하는 공장이었다. 돌을 종류별로 분류만 하면 되었고, 시급도 제법 높았다. 이미 많은 워홀러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자 당근 농장에는 직원이 전부 호주 사람이었다. 내가 간다면 한국 사람은 나 하나뿐이게 되는 것이었다. 단지 한국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곳의 유일한 외국인이자 이방인이 되는 샘이었다. 일터에서 철저하게 나 혼자 외국인이 된다는 점이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맘때 한국인들과의 연속적인 만남에서 그들의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서에서 조금 멀어지고 싶었다. 한국인을 마주치기 싫었다.
퍼스를 떠났다. 번버리는 퍼스에서 남쪽으로 차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다. 대략 서울과 대전 거리다. 퍼스에서 북쪽으로 2시간 거리인 진진에서 일했던 나는 남쪽으로 2시간 거리인 곳에서 일하게 됐다.
검트리로 번버리에서 제일 싼 집을 알아봤다. 집주인은 네팔 사람이었다. 간호사 일을 하는 그녀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은 듯했다. 집에 도착하니 거실 한 편에 생소한 불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는 네팔의 한 종교라고 얘기해 줬다. 그러면서 불교와 힌두교가 적당히 섞였다고 했다.
나는 침대가 두 개가 있는 방을 썼다. 내가 갔을 때 룸메이트가 없어서 방을 나 혼자 썼다. 그리고 그 집을 나가게 될 때까지 죽 혼자 쒔다. 그때가 유일하게 나만의 공간에서 사적인 삶을 영위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호주 치고 인터넷이 정말 빨랐다. 호주에 오고 나서 인터넷은 포기하고 살았었다. 시티에서도 빠른 인터넷을 쓰려면 비용을 상당히 지불해야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집의 와이파이를 무제한으로 쓰게 해 줬다.
농장과 집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진진에서 일할 때는 농장에 일하는 워홀러들이 워낙 많아 돌아가면서 차를 얻어 타고 다녔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심정이었다. 차가 있으면 단순히 유지비 외에도 돈이 나갈 것 같았다. 쉬는 날이면 차를 타고 호주의 아름다운 천해 자연환경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힘들거라 예상했다. 이번에는 구입해야 했다. 마땅히 셰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차를 구입할 때까지 2~3일 간 농장에 있는 한 직원(이하 올리버)에게 픽업을 부탁했다. 올리버는 나와 동갑인 호주 사람이었다.
차를 구입하는 날이었다. 검트리로 번버리 지역에서 가장 싸게 파는 차량을 찾았다. 1995년 산 빨간색 포드 경차. 어차피 6개월 정도만 이용할 차가 필요했으므로 비싼 차가 필요 없었다. 그리고 호주 생활에서 목표의식과 열정을 어느 정도 상실한 나는 차를 구매하는 데 있어 그리 꼼꼼하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날 밤 현금 1000불을 뽑아 차를 판매하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 앳돼 보이는 호주 청년이 나와 나를 맞아 줬다. 무척이나 밝은 청년이었다. 그는 나한테 차량 상태 확인 해 보고 싶거나 차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지 물어봤다. 나는 전혀 없다고 하고, 바로 구매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혹시 모르니 나와 함께 마을 한 바퀴 돌아보자고 했다. 차를 끌고 한 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차의 몇몇 하자에 대해서도 알려 줬다. 그는 호주사람 특유의 유쾌함이 잘 묻어있는 친구였다. 운전하던 도중 그 친구가 기분이 좋았는지 먼저 차량 가격을 깎아 주었다. 나는 1000불도 괜찮았는데 무려 200불이나 깎아 줬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차를 800불(당시 환율로 약 70만 원)에 구입하게 됐다.
차를 끌고 집에 오는 길이 묘했다. 아무리 잠시 사용할 똥차를 구입했다지만 인생 첫 차라고 생각하니 금세 정이 붙었다. 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다음날 차를 타고 출근할 아침이 기다려졌다.
다음날 차를 타고 출근하니 농장 직원들이 반겨줬다. 똥차여도 남자들 사이에서 차를 뽑으면 일단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한국이든 호주든 비슷했다. 올리버는 잠시 내 차를 봐주겠다면서 차 후드를 열었다. 이것저것 만지던 올리버는 엔진오일만 채우면 된다면서 차 구입가를 물어봤다. 올리버는 가격을 듣더니 아주 잘 샀다고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석양이 사선으로 내리고 있었다. 뻥 뚫린 도로 위로 금빛 물결이 물들었다. 이를 보니 들뜬 마음과 함께 페달을 밟았다. 똥차여서 가속이 아주 느렸다. 그리고 시속 100km에 이를 때쯤 차체가 덜덜 거렸다. 그래도 그 차가 좋았다. 내 차라는 생각에 뭐든 예뻐 보였다. 차한테는 ‘덜덜이’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붕붕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려다가 너무 흔한 이름일 것 같아서 덜덜이라고 불렀다. 농장에 있는 호주 사람들에게도 내 차 이름과 작명 이유를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