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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11. 2024

#감자, 당근 나라 주민들

 농장에 나 말고 Ted가 한 명 더 들어왔다. 내가 입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나이는 50은 되어 보이는 호주 아저씨였다. 나처럼 Ted라는 이름을 만든 이방인이 아닌 네이티브 Ted를 처음 만나게 됐다. 농장에서 주로 올리버와 Ted 아저씨랑 이야기를 했다. 각별히 친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중 올리버와 Ted랑 그나마 친해졌다. 그리고 신경쇠약에 걸린 인종 차별자(이하 토마스)가 한 명 있었다. 우리 모두 그를 별로 안 좋아했다.


 토마스는 항상 인상 쓰고 있었고, 짜증 내는 말로 이야기를 했다.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 말은 안 했지만 토마스는 나와 대화할 때랑 호주 사람들과 대화할 때의 태도가 무척이나 달랐다. 나와 대화할 때는 짜증 섞인 말투와 높아지는 언성은 항상 기본이었다. 말을 하다가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짜증을 내면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미 호주 생활 1년 반이 넘은 내겐 전혀 심리적 타격이 없었다. 그동안 교묘하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오히려 더 많이 만났었다. 대처하기도 애매하고, 상대방의 교묘한 차별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엔 영어가 부담 됐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 재밌었다.(길거리에서 마주친 주정뱅이나 십 대 애들을 제외하곤) 그전에 일하던 아시아인들은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네 뜻대로 안 움직여 줄게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다가올 일이 기대됐다.


 처음엔 토마스의 헛소리를 그냥 웃어넘겼다. 일단 농장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고, 농장의 시스템을 파악할 때까지만 참기로 했다. 어느 정도 농장에 적응했을 쯤이었다. 그날도 토마스가 아침부터 잔뜩 화를 내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을 했다. 토마스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어느새 토마스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더 이상 흥분 시키면 안 될 것 같아 그제야 알아들었다고 했다. 또 하루는 농장 직원들과 다 같이 서서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을 때였다. 토마스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 앞에서 발이 꼬여 넘어졌다. 그 넘어지는 꼴이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넘어졌다. 이불킥과 흑역사 그 자체였다. 나를 비롯한 모든 농장 직원들이 말 그대로 빵 터졌다. 웃는 내 얼굴을 보고 더 화가 난 듯했다. 평소라면 괜한 트집을 잡으며 내게 뭐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같이 웃고 있으니 나만 콕 집어서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토마스는 민망했는지 나를 잠깐 노려보곤 그 자리를 떴다. 걸어가는 그 의 뒷모습에서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이 보였고, 마구 내뱉은 욕설이 들려왔다. 


 하루는 Ted 아저씨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날은 평소와 달리 토마스가 우리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Ted 아저씨가 일 끝나고 집에 가서 주로 뭐 하냐고 물어봤다. 나는 씻고 헬스장 가서 운동한다고 했다. 그러자 마자 토마스는 나한테 운동을 해선 안된다고 했다. 농장에서 써야 할 에너지를 운동으로 낭비해선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어서 자기는 일 끝나면 피곤해서 집에 가서 자기 바쁘다며 운동할 체력이 있는 것을 보니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되받아쳤다.


 “No wonder you became such a fatass”(네가 왜 뚱뚱한지 알겠네)


 Ted 아저씨가 놀란 표정과 함께 껄껄 웃었다. 토마스는 엄청 흥분해서 나한테 힘껏 쏘아붙였다.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실 욕설이 섞어가며 빨리 말해 알아듣지 못했다. 토마스는 씩씩 거리며 멀어졌다. Ted 아저씨는 내게 잘했다는 말과 함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날 이후 토마스는 내게 업무상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Ted 아저씨는 젊었을 때 군대를 다녀왔다. 그래서 군대를 다녀온 나를 좋아했다. 남자가 군대에서 고생도 하고, 총도 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면서 나한테 진정한 남자라고 말해 줬다. 한국 아저씨들이나 말할 것 같은 이야기를 서양 아저씨한테 들으니 신기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끼리 흔히 하는 말을 알려줬다. 


 “No man, if you ain’t in the army”(군대 안 갔다 오면 남자도 아니지)


 Ted 아저씨는 격하게 동의하면서 좋아했다. 그러면서 아저씨가 군대에서 주로 사용했던 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곱창에 소주 한잔 먹으면서 시작할 것 같은 군대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군대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한창 피 끓던 시절, 자신이 겪은 모험담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당연한 것 같았다.


 Ted 아저씨도 한국 군대 이야기를 재밌어했다. 특히 겨울철 이야기를 재밌어했다. 호주 대부분의 지역에서 눈을 보기 힘들다. 그리고 국토가 대부분 평지이다.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부대가 산에 있고, 혹한기 훈련과 눈을 ‘하얀 쓰레기’라고 부르는 한국 군대 문화를 재밌어했다. 게다가 Ted 아저씨가 군인일 때 맡았던 보직이 나와 유사했다. 아저씨가 직접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었으면 나는 그 무기를 정비하는 보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관리했던 무기가 같은 무기였다.


 올리버는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중에 그 집으로 Ted 아저씨가 들어가 살았다. 올리버는 늘 배시시 웃는 친구였다. 튀어나온 배 때문에 늘 입고 있는 옷이 위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올리버의 아랫배는 뜨거운 호주의 자외선을 늘 받았다. 나는 그런 올리버가 긍정적이고 유쾌한 사람 같았다. 그런 올리버가 하루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일하는 도중 집으로 갔다. 다음날 평소와 같이 유쾌한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올리버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그는 올리버에게 굽신거리는 자세를 취하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올리버는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올리버 뒤를 쫓아 다닌 그 남자는 이내 농장의 다른 직원들에게 굽신거리는 자세를 취하며 무언가를 요구하고 다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게 Ted 아저씨가 다가왔다. 곧이어 Ted 아저씨가 전후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 남자는 올리버 여자친구의 남동생이었다. 마약 중독자로 이미 전과가 있었다. 올리버는 여자친구의 동생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끔 경제적으로 지원도 해 줬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 돈을 전부 마약에 탕진했다. 그러면서 달라질 거란 거짓 약속을 해오며 올리버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빌려왔다. 몇 번의 도움에도 달라지지 않자 올리버는 도움의 손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 올리버를 괴롭혔다. 그날도 ‘이번만은 진짜’라는 허황된 말과 함께 또 돈을 빌리러 농장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올리버가 거절하자 다른 직원들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한테 올리버의 이름을 팔아가며 돈을 빌리려 했다. 물론 모두 거절했다. Ted 아저씨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혹시 나한테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꼭 거절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날은 늘 헤벌쭉 웃었던 올리버의 화난 얼굴을 처음 본 날이었다.


 그날 알았다. 마약 중독자의 삶이 어떤 의미로 얼마나 간절한지. 나보다 어린 그 남자는 얼굴 가죽이 비쩍 말라 있었다. 머리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나이 들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탈모가 아닌, 누군가 한 주먹씩 강제로 뜯어낸 것 같았다. 그 퀭한 눈은 기운이 없어 보임과 동시에 광(狂)적인 광휘(光輝)를 내뿜었다.


 다행히 그날 이후 그 남자는 농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올리버는 여느 때와 같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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