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The first story: 준비생(準備生)

by Ted 강상원

준비생(準備生)



"나란 인간은 쓸모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점점 커져왔다. 지난날의 과거는 실패와 후회로 가득했다."



#0재


이른 새벽, 한 청년은 작은 방에서 도시락과 책 몇 권을 싸들고 일터로 향했다. 그가 짐을 싸는 책상 위에는 밤새 공부한 청년의 흔적 이 남아 있었다. 푸르스름한 주변 위로 청년의 입김이 무겁게 말려올라가 흩어지고 있었다.

B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돈을 벌고, 틈틈이 공부를 하고, 건강관리를 위한 운동 또한 빼놓지 않았다. 24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 B였지만 적절한 교우관계를 유지할 만큼 시간관리에도 능했다. 주변 사람들은 B를 좋아했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B를 후배들은 동경했고, 선배들은 기특 해 했다. B와 노는 것이 즐거운 친구들은 더 자주 시간을 보내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B의 삶을 응원했다. B는 주변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바람직한 청년이었다. 어른들은 B가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손가락을 치켜 새웠다.

B에게는 꿈이 있었다. B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B가 초등학생일 무렵 하루는 장래희망을 적어 내야 했다. 아이들의 진로 상담을 위해 학교에서 실시하는 일종의 설문 조사였다. 설문지에는 본인의 장래희망, 그 이유, 앞으로의 계획, 꿈을 위해 현재 실천해야 하는 것 등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설문지 일지 교육일지 세뇌 일지 모르는 종이에 아이들은 열심히 무언가를 써 나갔다.

같은 반 친구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되고 싶은 장래희망과 계획 등을 적어 냈다. B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하나같이 특기가 있었다. 노래,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태권도, 축구, 농구, 펜싱, 아이스하키, 피겨스케이팅, 영어, 수학, 과학, 독서, 논술, 글쓰기, 한자, 서예, 바둑 등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가 영재였다. 모두가 ‘수학 영재학원’, ‘미술 영재학원’ 등을 다니고 있었다. B에게 친구들은 이미 자신의 꿈을 발견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은 과학자, NASA 엔지니어, 가수, 사업가, 대통령, 축구선수 등이 되고 싶다며 거침없이 이야기했고, 종이에 이를 적어 나갔다. 교실에서 B만이 무의미하게 연필을 쥐고 있었을 뿐이다. B는 당장 집에 가서 아무 학원이나 보내달라고 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설문지를 제출했다. 선생님은 아직 제출하지 못한 학생은 집에서 부모님과 상의해 본 후 이번 주 내로 제출하라 했다. B는 그날 시무룩한 상태로 집에 들어왔다. 설문지에 대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B의 혼란과 불안이 잠재워지지는 않았다. 설문지를 제출해야 하는 마지막 날이 됐고, 같은 반 아이들 중 B만이 끝내 종이를 내지 못했다. 마지못해 제출했지만 B의 꿈이 아닌 부모님의 꿈이 적혀 있었다. 아직은 장래희망에 대해 구체적인 대상이 없어서 부모님의 꿈을 B가 적어낸 것이었다. 사업을 해 오시며 비 정기적인 수입에 대한 불안감과 불편함이 컸던 B의 아버지는 B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이왕이면 B가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다.


어렸을 적 가난했던 B의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유일한 남자인 친오빠의 성공을 위한 희생양이 돼야 했다. 유독 책 읽는 것이 좋았고, 문학 선생님께 받은 칭찬 덕에 국어 선생님이라는 꿈을 가 져지만, B의 외할머니는 “여자가 무슨 공부야”라는 말로 딸의 꿈을 무시했다. 그때부터 B의 어머니는 다음 생에는 꼭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B가 태어난 후부터는 그 꿈을 다음 생이 아닌 현생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바람으로 남겨두었을 뿐 B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B의 어머니는 가끔은 선생님이 되면 좋겠어라고 얘기할 뿐 B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하든 무조건적인 응원과 격려를 해왔다.

설문지를 바탕으로 선생님은 매일 4 ~ 5명의 아이들과 진로상담을 하며 아이들에게 칭찬, 격려, 응원을 해 주었다. B는 진로상담이 하기 싫었지만 어김없이 B의 차례가 다가왔다. 설문지에 B의 꿈이 선생님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B의 선생님은 조금은 상기된 마음과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B에게 말을 건넸다.


“B는 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B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설문지에 ‘내가 00이 되고 싶은 이유?’라는 질문이 있었지만 B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B의 설문지에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만 ‘나의 꿈’이라는 질문 아래 적혀 있었다. 제일 첫 질문을 제외한 모든 질문은 공란이었다. 이를 조금 이상하게 여긴 선생님은 B에게 선생님이 정말 꿈인지를 물어봤다. B는 여전히 아무 말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사실 몇몇 아이들 또한 본인의 장래희망을 정하지 못해 부모님의 희망사항을 적어 왔다. 이를 알고 있는 선생님은 자신의 꿈은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주었다. 선생님은 B에게 다시 물어봤다.


“혹시 아직 꿈을 정하지 못했어요?”


B는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하고 싶은 거, 되고 싶은 거 없어도 괜찮아요. B의 나이는 열심히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선생님은 꿈은 절대 하루아침에 결정되지 않는다 했다. 인생을 좀 더 살아가면서 나를 알고, 세상을 이해하면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거라 했다. B는 이 말에 묻어 나오는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지만,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을 살며 나라는 존재를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는지 아직 모르는 B였지만, 저 말속에 담긴 선생님의 말이 자신을 위한 배려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꿈이 있어야 돼’, ‘목표가 있어야 돼’, ‘계획을 세워야 돼’, ‘실천해야 돼’. 늘 무언가를 채워야만 한다고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선생님은 유일하게 비움을 이야기 한 어른이었다. 늘 어른들은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제법 특별하고, 제법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고, 제법 높은 수익을 올리고, 제법 존경받는 무엇이었다. 선생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특별하다 했다. 나의 고민은 오로지 나의 것이므로 그 고민을 하는 시간 모두가 소중하다 했다.

그날 이후부터 B는 선생님의 말에 더 귀 기울였다. 위로와 배려는 동경과 신뢰를 낳았다. B는 그렇게 자아를 고민하는 혼란 속에서 동경하는 어른을 등대 삼아 조금씩 성장해 갔다. 어느덧 B는 선생님을 꿈꾸고 있었다.



#차근차근


B가 대학에 갈 무렵부터 앞으로 선생님의 수요가 적어질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학생 정원이 줄어가는 만큼 해마다 뽑히는 선생님의 수도 줄어들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임용고시를 통과한 후에도 정식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힘들 수 있었다. B의 고3 담임은 이를 염려해 다른 전공을 추천했다. B의 성적이면 충분히 입학할 수 있는 대학과 유망한 학과가 많았다. 하지만 B는 유망한 - 취업이 잘되는 - 학과에 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배우고, 올바른 가르침을 연구하고, 아이들이 잘 성장하게 지도하는 어른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싶었다. 그렇게 B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B는 대학생활 동안 높은 학점은 물론,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스스로 많은 고민을 했다. 이런 깊은 사색에서 나오는 B의 질문과 철학은 가끔씩 교수님들을 놀라게 했다. 방학이면 각종 봉사활동을 하고, 고전 문학을 읽으며 미래의 제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를 내면에 쌓아 나갔다. 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넓은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2년여의 휴학 기간을 가지며 배낭여행을 다녔다. 이마저도 스스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 복학한 B는 어느덧 졸업반이 돼 있었다. 교생실습을 나가가 전날 밤은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만큼이나 설레서 잠을 설쳤다. 한 달여간의 교생실습을 마치면서 B는 자신의 꿈에 더 확신을 가졌다. 실습 마지막 날 한 학생에게 받은 편지는 B의 열정을 더 빛나게 했고, 자신의 꿈에 가치를 부여했다.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더 겸손해질 수 있었고, 보람을 느끼며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교생실습에서 만난 또 다른 교육 실습생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각자의 교육관을 토론했다.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또래의 동료들과 밤새 이야기하며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꿈을 응원했다. 무리 중 유독 B와 교육관이 비슷한 교육실습생이 있었다. 그녀의 집안사람들 대부분은 분필을 잡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을 꿈꿔왔다 했다. 그녀는 B에게 “왜 선생님이 되기로 했어요?”라는 질문을 건넸고, 둘의 이야기는 밤새 이어졌다. 우연으로 시작된 질문은 필연이 되면서 둘의 대화는 끝이 날줄 몰랐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B와 그녀는 손을 잡고, 어깨를 내어주고, 서로를 깊이 안아주며 각자의 꿈을 응원하는 연인이 됐다.

B와 함께 선생님을 꿈꾸는 친구들은 B에게 영감을 받곤 했다. B의 동기, 학과 선 후배, 교수님, 친척 어르신, 부모님, 친구들, 여자 친구, B가 동경했던 선생님까지 모두가 B는 좋은 선생님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는 참된 스승이자 올바른 어른이 될 것 같은 신뢰가 충만한 청년이었다.



#졸업


시간이 흘러 B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선생님이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한 발짝식 나아가고 있었다. B는 자신의 꿈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는 기본 생활비만 충당하기도 바빴지만, B는 최대한 집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학원비의 일부도 스스로 벌었다. 임용고시 준비를 위한 사교육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B는 하루빨리 선생님이 되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려 했다.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B는 하루하루 충실했다. 24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 B였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함과 동시에 적절한 교우 관계를 유지할 만큼 시간 관리에도 능했다. 틈틈이 운동을 하며 체력관리 또한 빼놓지 않았다. B의 주변 사람 모두가 B를 좋아했다. B는 성실한 취업 준비생이었다.

B의 선배들과 동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B 또한 졸업 후 노량진으로 향했다. 학사 학위 다음은 석사학위가 아니었고, 취업은 더더욱 아니었다. 4년의 고등 교육과정이 끝나고 나면 또 다른 시험을 볼 자격을 부여받을 뿐이었다.

4년의 고등교육 과정을 마치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취업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초등, 중등, 고등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이다. 다만 다른 점은 국가나 어떤 단체에서 관리하는 시스템도 아니고, 과거부터 내려오는 관습도 아니다. 하지만 이는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진학하고,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진학 과정이 됐다. 아무런 학문적 진전이 없는 진학 과정이다. 관습이 아니었지만 으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현상이 됐다. 전통이 아님에도 현재의 대학 졸업생들은 이를 답습했다. 졸업이 아직 멀게 느껴지는 대학생들에게도 자연스레 반복될 집단 행위였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전 세계는 긴 장기 침체를 맞이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경제 성장률이 둔화됐다. 능력 있는 젊은이들은 갈수록 많아졌지만, 이를 활용할 회사들은 갈수록 적은 인력을 원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안정적인 직업을 원했다. 큰 회사보다 내가 오래 일할수 있는 회사를 선호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이 아닌,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가 되는 세상이 왔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없이 강해 지도하고, 한없이 약해지기도 했다. 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 나갔지만 채우고 나면 정작 자신은 없었다. 중요하다 여기는 것들을 채우다 보니 제일 중요한 나라는 존재는 망각됐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과 그 속도성은 청년들이 꿈을 재정비할 시간까지 잠식했다. 최대한 어린 시기에 진로를 정하고 이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준비를 시작한 사람들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며 경쟁에 앞서 나갔다. 내가 원하는 삶을 고민하는데 시간 낭비하지 않고, 하루빨리 가야 할 길을 선택해야 했다. 아주 현실적으로. 이제 직업 선택은 진로 고민의 영역보다는 누가 더 먼저 발을 들이미느냐의 속도전으로 변해 있었다. 꿈을 꾸기에 앞서 세계 경제가 국내 취업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더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B가 대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임용고시 경쟁률이 크게 높지는 않았다. 당시 졸업하는 선배들을 보면 늦어도 2-3년 안에 다들 임용고시에 합격해 발령을 받고, 교사로서 살아갔다. 학교라는 장소에서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선생님이 되어 갈 수 있었다. 고작 4- 6년 남짓한 사이에 경쟁률은 크게 올라갔다.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사람들은 점점 더 안정적인 직업을 원했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때로는 영감을 주고, 다음 세대를 올바른 어른으로 키우며 얻는 보람보다 내 노후를 책임져 줄지 모르는 연금이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더욱더 매력 있게 했다. 출산율은 점점 낮아졌고, 앞으로도 계속 낮아질 전망이었다. 학령인구가 점차 줄어들면서 이 사회는 더 이상 많은 선생님을 원하지 않았다. B가 졸업할 때쯤에는 임용고시에 합격하기는 더 힘들어졌고, 합격 이후에도 발령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B는 교육 실습을 다녀온 후부터 본격적인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졸업 예정을 앞두고, 보는 첫 임용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음이 맞는 동기 및 후배들과 스터디를 꾸려 초수 합격을 목표로 공부했다. B를 포함해 졸업반 4명(B, 동기이자 동갑내기 친구, 같은 학번 형, 후배)의 예비 교사들은 의기투합하여 서로의 결의를 다졌다. 결코 쉽지 않았지만 후배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1차 시험을 통과했다. 2차 면접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1차 합격의 기쁨을 누릴 시간도 없었다.

스터디원 중 한 명은 1차 필기시험에서 당연히 떨어졌을 거라 생각해 이후 스터디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1차 합격 연락을 받자마자 그날로 스터디에 다시 합류했다. 탈락한 후배는 끝까지 B를 포함한 스터디원의 면접을 도와주었다. 그는 같이 공부하는 스터디원들이 진심으로 합격하기를 원했고, 오히려 부담이 없는 상태에서 면접 준비를 도와주는 것이 그간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알게 해 주는 것 같다 했다.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으니 주관성이 짙어 보이던 면접 과정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며, 이듬 해 볼 임용시험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된다 했다. 그 후배는 2차 시험 당일 아침에도 B를 포함한 스터디원에게 응원을 빠뜨리지 않았다.

2차 시험까지 치른 후 그간 동고동락한 스터디원들과 3박 4일 여행을 갔다. 최종 합격여부와 관계없이 그간의 노고를 서로 토닥이며 젊은 날의 추억을 만들고 왔다. 이후 며칠이 지나 최종 합격 발표 날이 왔다. 스터디원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락이었다. 1차 필기시험 후 본인은 어차피 탈락이라며 잠시 스터디에 나오지 않았던 B의 동기가 유일한 합격생이었다. B는 1차 필기시험에서 제법 좋은 점수를 받아 괜찮을 줄 알았지만 면접에서 너무 힘이 들어간 것이 폐인이었다. 교사라는 꿈을 꾸어온 시간과 노력이 간절함을 만들어 낸 만큼 의욕이 앞서 수업 시연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2차 면접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았지만 1차 필기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이 화근이었다. B의 점수가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1점 차이로 수많은 지원자가 탈락했고, B 또한 그에 해당됐다.

적어도 스터디 내에서 초수 합격자가 나왔으니 그간 자신들이 공부해 온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이 위로가 됐다. 아직 젊으니 한 번 더 도전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조금의 시간이 더 흘러 졸업식 날이 됐다. 지겹게 봐온 교내 동상도 이제 자주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들었다. 그 아쉬움을 달래며 스터디원 4명은 동상 앞에서 훌륭한 교사가 되자며 다짐했다. 비 수도권 출신인 한 살 위의 형과 후배는 당장 내일부터 노량진으로 향한다 했다. 서울에서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만큼 서울에서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형의 이유였다. 후배는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강요 같은 권유에 어쩔 수 없다 했다. 유일한 합경 생인 B의 친구는 2학기 발령 혹은 내년 발령을 기다려야 했다. 임용고시 성적순으로 발령을 받다 보니 순위에서 밀린 상태였다. 발령이 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 했다. B에게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이들은 각자의 계획을 공유하고, 응원했다. 이 예비교사들은 동상 앞에서 졸업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채 사진을 찍었다. 그날 이들의 부모님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지만, 유독 B의 친구 부모님 만이 졸업과 함께 임용고시 합격을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됐다.

일주일 뒤 B는 다시 학교를 찾았다. 대학생활 동안 B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B는 평소 교수님께서 즐겨 드시던 차를 선물하였고, 교수님은 B에게 책을 선물하였다. 교수님은 많은 졸업생들이 졸업 후 노량진으로 향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노량진으로 진학 아닌 진학하는 제자들을 보며 교수님은 본인이 무능력한 탓에 아이들이 고생한다며 매년 졸업 시기마다 씁쓸함을 느끼셨다. 그렇게 노량진이라는 장소가 달갑지 않으면서도 가끔은 졸업한 제자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노량진을 찾았다. 제자들에게 밥을 사주면서도 혹여 공부시간을 뺏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셨다. 고생한 제자들이 결국 임용고시를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러면서 노량진이라는 장소의 용함에 감탄했다. 자신의 못남을 그곳이 채워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노량진은 교수님에게 애증의 장소였다. 교수님은 B가 노량진으로 향하지 않았으면 했다. 혹여 자신의 생각이 B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아닐까 하여 아무 말 안 했지만 어렴풋이 교수님의 생각을 느끼는 B였다.



#노량진


B는 노량진으로 향하지 않았다. 교수님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학원에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준비해 합격하는 사람이 많았다. B 또한 자신이 있었다. 인터넷 강의를 통해 학습을 하고, 독서실에서 자습을 했다.

B의 집은 경제적으로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무리 없이 B의 학습을 지원해줄 정도의 수입은 있었다. B 또한 이를 알고 있었지만, B는 최대한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려 했다. 독서실 총무 아르바이를 하며, 틈틈이 공부했다. 독서실에 다니는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주었고, 그중 몇 명은 B에게 과외를 받았다. 인터넷 강의 비용과 문제집 가격이 부담됐지만 B는 최대한 스스로 충당했다. 조금씩 모자란 부분은 부모님께 지원을 받았으나 B는 나중에 꼭 갚을 돈이라 생각하며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

따뜻한 봄내음이 색색들이 꽃을 깨우는 듯하더니 어느덧 무더위가 기승하는 계절이 왔다. B를 비롯한 스터디원들은 오랜만에 모여 그간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합격한 친구는 발령 명령 노량진으로 향한 형과 후배는 B에게 절대 오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 있을 곳이 못 된다 했다. 후배와 형의 노량진 생존기는 재밌으면서도 씁쓸했다. 6개월 만에 제법 수다스러워진 후배였다.

그들에 의하면 노량진은 경찰관, 소방관, 군무원, 교도관, 외교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5급, 7급, 9급 등 다양한 꿈이 모이는 곳 같지만 결국은 공무원이라는 한 단어로 획일화되는 곳이었다. 후배는 우스게 소리로 공무원(公務員)이 양성되는 곳이 아니라 공산품(公産品)이 양산되는 곳이라 했다. 같은 학원에 임용고시만 9년째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데, 매일 아침 그 사람을 보며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며 공부 의지를 불태운다 했다. 그곳에서는 꿈을 향한 열정보다 실패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존에 더 효율적이었다. 순수하고 나약하고 젊기 때문에 느끼는 불안은 너무도 쉽게 공격적으로 변한다. 형과 후배는 제법 거칠어져 있었다.

매일 아침 학원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다양한 선교활동을 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있었다. 노량진 수험생들은 지옥문으로 들어가기 전 마주해야 하는 일종의 케르배로스같은 존재들이라며 우스개 소리로 이들을 선교베로스라 불렀다. 이 중 한 아주머니는 모든 공무원 시험에 성경 과목을 추가해야 한다며 지옥문을 지켰다.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경영의 기초가 되는 공무원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적재적소에서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다른 아저씨는 대한민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시험에 현대사 비중을 늘려야 한다 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모르고 자란 세대들이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고 있다며 박정희 과목 추가가 필수라고 외쳤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으려 하는 놈들이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모르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외치며 노량진을 지켰다.

유일한 합격생인 친구는 연수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수원에서 만난 동기 중 노량진 출신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노량진에서 버티는 방법은 교사라는 꿈을 마음에 새기는 것보다 합격 후 평생 보장된 고용안정과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월급 그리고 연금을 생각하는 것이라 했다. 연수원 이야기를 들으며 B를 비롯한 스터디원들은 궁금한 점을 물어보며 부러움을 달랬다. 각자의 위치에서 애씀을 위로하며 이들은 내년에는 모두 선생님의 자격으로 만나자며 헤어졌다.



#반면교사


지루한 장마가 지나고, 여름이 끝나는 듯싶더니 어느덧 추석이 다가왔다. 취준생과 수험생에게는 크게 의미 있는 날은 아니었다. B는 연휴 동안 모의고사를 풀어보고, 그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명절 당일 저녁에만 가족모임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B의 작은 아버지는 B가 어렸을 적부터 B를 영특해했다. B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아들 둘을 슬하에 두었는데, 이들이 B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며 늘 B를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아들 모두 작은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쳤다. 작은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모지리들이었다. 큰 아들은 학창 시절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큰 아들이 공부와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속상한 작은아버지는 늘 전교 1,2등을 다투는 B를 자식으로 둔 큰형을 부러워 함과 동시에 B를 영특해했다. 매번 명절이면 작은 아버지의 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용돈을 한 움큼 쥐어 주셨다. 용돈을 주고 나면 늘 아들들에게 너희도 B처럼 공부 잘하면 이런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작은아버지 나름의 교육 철학이었다.

작은아버지의 첫째는 적어도 부모 속을 대놓고 썩이지는 않았다. 작은아버지의 바람대로 공부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제법 성실한 모습을 보였고, 속된 말로 어디 가서 사고 치고 다니는 불량 학생은 아니었다. 특히 작은아버지의 속을 썩인 것은 둘째였다. 사춘기 무렵부터 반항이 심해지더니 가출을 일삼았다. 담배와 술은 물론이고 학교를 마음대로 빠지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누군가에게 폭행을 가한 적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작은아버지는 매번 명절이면 자식농사 비결이 무엇인지를 어머니께 물어봤다. 작은 아버지의 질문과 집착이 더해질수록 어렸을 적 친했던 사촌형제는 점점 더 서먹해졌다. 아이들의 유대관계는 어른들에 이해관계 앞에서 무력했다. 작은 아버지는 유독 B를 예뻐했다.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나고, 작은아버지는 공부하기 힘들지 않냐며 용돈을 쥐어주셨다. 그리고 이 용돈은 본인이 아닌 두 아들들이 주는 용돈이라며 형으로서 용돈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했다.

작은 아버지의 큰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국내 굴지의 기업에 공장 근로자로 취직했다. 1~2년의 임시직으로 일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으로 유력했던 후보의 공약 중 하나가 임시직 철폐였다. 유력했던 후보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됐고, 그 굴지의 기업은 그의 공약이 빛을 발하기 좋은 무대였다. 큰 아들이 성실한 모습을 보이고, 나이도 어린 점에서 가산점을 받기도 했지만 정책의 흐름이 크게 바뀌는 시점에서 혜택을 본 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작은아버지만이 이를 무시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나서 큰 아들은 군대에 갔다. 작은 아버지는 군대에 있는 시기도 호봉으로 인정해 주는 그 기업을 찬양했다. B를 보며 대학을 강조하며 큰 배움을 연설했던 작은아버지는 이제 대기업을 강조하며 큰 연봉을 찬양했다. 이후 명절마다 친척들은 알고 싶지도 않은 그 회사의 복지 제도를 낱낱이 들어야 했다.

작은 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석수를 겨우 채워 고등학교를 제 때에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둘째 아들은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술집, 당구장, 피시방 등을 전전하였다. 군대라도 일찍 다녀오라는 작은아버지 말에 시큰둥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해병대에 지원한다고 했다. 그것도 일반병이 아닌 해병대 부사관으로 지원한다는 그 말에 작은아버지는 신뢰가 가지 않으면서도 나름 기특해했다. 작은아버지로서는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결정이 바뀌지 않기를 바랐다. 둘째 아들이 입대하는 날까지 작은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혹여 심경의 변화가 있을까 조마조마했다. 입대한 뒤부터 둘째 아들은 조금씩 달라지더니 어느덧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군 생활을 천직으로 느낀 둘째 아들은 하사로 복무하며 바로 장기 신청을 했고, 최근에 장기 심사에 합격했다. 학창 시절 사고만 치던 남자가 군대 가서 철든 흔한 이야기 중 하나였다.

두 아들 모두 자기를 닮아 머리가 좋다며,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했으면 두 아들 모두 서울대에 갔을 거라 했다. 머리가 좋아 상황판단이 빠르고, 상황판단이 빠르다 보니 젊은 나이에 자리를 잡았다 했다. 그 모지리들은 이제 명절이면 작은아버지께 용돈을 드리는 최고의 심복이 됐다. 작은 아버지는 아들들이 용돈을 너무 많이 줬다며, 본인이 조금 더 얹어서 주는 것이니 동생들한테 부끄럽지 않게 공부 열심히 하라 했다. B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모지리들에게 어느덧 B는 반면교사였다.



#붕어빵


수치심과 오만함이 풍성했던 한가위가 지나고, 어느덧 임용고시 날이 다가왔다. 시험을 2주 정도 앞두고, 스터디원들은 다시 모였다. 시험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그간 각자 해온 공부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서로가 공부한 내용을 확인해 주며 조금씩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컨디션 조절 측면에 있어서도 같은 꿈을 꾸어온 동료들과 이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시험 당일일 도래했고, B를 비롯한 이들은 작년에 합격한 친구의 응원 메시지를 받으며 필기 시험장으로 향했다.

다들 성실하게 준비한 만큼 필기시험은 모두 합격이었다. 이들 모두 시험장을 나오며 필기는 합격했다는 믿음이 있었다. 어제의 성실성이 오늘의 자신에 대한 신뢰를 만들었다. 필기시험 다음날부터 이들은 다시 모여 면접 준비를 했다. 작년에 합격한 친구도 스터디에 참여해 면접 준비를 도와주었다. 스터디원 보다 1년 먼저 합격한 친구지만 아직 발령을 받지 못하였다. 그 친구 또한 오는 3월에 발령받을 것을 대비해 준비해 온 수업을 보여주며 서로 간의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작년의 경험을 노하우 삼아 스터디는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B를 비롯한 이들은 스터디원 모두가 2차 시험까지 합격해 선생님이 될 거라는 믿음이 충만했다.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 자신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그간의 성실함이 뒷받침되는 믿음이었다. 특히 학창 시절부터 괴물로까지 불리었던 B가 이번 시험에도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1차 합격자 발표가 났고, 예상대로 모두가 합격이었다. 곧바로 면접날이 잡혔고, 순서는 후배, 같은 학번 형, B 순서였다. 후배가 먼저 면접을 보고 그다음 주 월요일에는 형이 면접을 봤다. 바로 다음날 화요일이 B의 면접날이었다. 후배는 준비해온 대로 하면 문제없을 것이라 했다. 형은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더 중요하다 했다.

B의 면접날이 밝았고, 양 볼을 애리는 찬 바람을 맞이하며 B는 면접장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며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B는 주머니 속에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B의 주머니에는 작은 쪽지가 있었다. B의 어머니께서 B 몰래 넣어 놓은 것이었다.


“B야 고맙다”


B는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면접장에 도착했다. 대기실에 들어가니 임산부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다. 배가 부른 모습을 보아하니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얼마 안 있어 면접자들이 다 도착했고, 면접 순번을 정하기 위한 제비뽑기를 했다. B는 1번을 뽑았다. 1번을 뽑은 만큼 면접장을 빨리 나갈 수 있었다. B를 비롯한 면접자들 모두 제비뽑기를 마쳤고, 제일 먼저 도착했던 임산부는 거의 마지막 번호인 18번을 뽑았다. 적어도 오후 4시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던 임산부는 본인보다 앞번호의 수험생들에게 혹시 번호를 바꿔줄 수 있는지 양해를 구했다. 몸이 안 좋거나 임산부 같은 특수한 상황의 경우 해당하는 조의 수험생들 동의하에 순서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상황은 안타깝지만 다들 몇 년간 이 시험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청춘들이다 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B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도움이 필요한이에게 도움을 건네지 않는 사람이 교사로서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내 B는 임산부에게 자신의 번호를 건네주며 번호를 교환했다. 면접관에게 이를 알리고 B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임산부는 연신 숙이기 힘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B는 준비해온 자료와 노트를 바탕으로 침착하게 면접 준비를 했다. 중간중간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긴장을 달랬다. 시간이 지나 B의 면접 차례가 됐다. 면접장에 들어서니 면접관들도 제법 지쳐 보였다. 이내 B를 보니 면접관들의 표정이 조금은 호의적으로 변한 듯했다. B가 임산부와 순서를 바꿔준 사실이 면접에 어떤 영향을 주어서도 안되지만 선의를 베푼 청년에게 약간의 호의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면접은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호의스럽지도 않은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지난해의 실패가 경험이 되어 한 층 더 자연스럽고 성숙하게 면접에 임하는 B였다. 면접이 끝나고 나와보니 어느덧 날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B는 아침에 어머니께서 B 몰레 넣어둔 쪽지를 다시 펼쳐본 후 집으로 향했다.

면접 이후 B는 여자 친구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둘 다 수험생활로 인해 서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못했다. 이들은 그간 나누고 싶었을 행복과 젊은 시절 응당 누려야 할 추억을 매일매일 새기러 다녔다.

최종 발표는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번 설날은 조금 이른 1월 말에 찾아왔다. 이번 설은 생각보다 조용히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B였다. 특히 작은아버지께서 별 이야기가 없으셨다. 연휴가 끝나고 마침내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났다. 오전 10시가 되자마자 B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서울시교육청 사이트에 접속했다. 천천히 천천히 합격자 명단을 볼 수 있는 사이트 메뉴로 마우스 커서를 옮겨갔다.


최종 커트라인: 158.00

B: 158.21


합격했다. B뿐만이 아니었다. 스터디원과 여자 친구 모두 합격이었다. B의 점수가 제일 낮은 것이 예상외였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지방에 있는 여자 친구와는 오는 주말에 만나 합격의 기쁨을 나누기로 했다. B를 비롯한 스터디원들은 예전에 약속했던 식당에 모여 이 환희를 즐기기로 했다. 먼저 합격한 B의 동기도 오기로 했다. 식당에 가니 노량진 출신 수험생 두 명이 먼저 와 있었다. 이들은 식당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B를 먼저 발견하고, B를 불렀다.


“B 선생님. 여기예요.”


쑥스럽지만 기분 좋은 호칭이었다. 자신의 지난날이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함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합격의 달콤함은 추운 날 온몸을 기분 좋게 물들이는 따스한 코코아 같았다.

B의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조금 늦게 자리에 합류했다. 이들은 대학교 시절의 추억부터 그간 선생님이 되기 위해 달려온 모든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수험생활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 들기 전까지 공부로 가득 찬 생활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많은 사연이 피고 지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이를 더더욱 깨달았다. 수험생활이 지칠 때 위로가 돼준 동료, 글, 커피 한잔. 교육학이라는 학문을 탐구하며 성찰하게 된 내면. 나의 꿈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물어온 나날.

공장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반복되는 삶이었지만 인간은 항상 같은 제품을 찍어내는 기계와는 다르다. 어제와 1초도 다르지 않은 스케줄을 보내도 인간이 느끼는 생각과 감정은 매일이 다르다.

B와 동료들은 빠른 시일 내에 발령받기를 바라며 헤어졌다. 발령이 임용고시 성적순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아슬아슬하게 합격한 B의 경우 이듬해 발령을 바라봄이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붕어빵 가게가 B의 눈에 띄었다. 약간의 기분 좋은 취기가 오른 B는 제법 많은 붕어빵을 주문했다. 얼근한 술기운이 B를 조금 허기지게 했지만, 그보다는 어머니가 생각나 붕어빵을 사려했다. B의 어머니는 추운 겨울에 노점에서 파는 붕어빵을 좋아했다. 붕어빵이 익어가는 동안 B는 연신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젊은 청년이 유독 유쾌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붕어빵 가게 사장님은 B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사장님, 저… 임용고시 합격했어요. 이제 곧 선생님 돼요.”


B는 조금 더 씩 웃으며 약간은 쑥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붕어빵 사장님은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그동안 수험 생활하느라 고생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젊은 친구가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룬 것을 보니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며 붕어빵 몇 개를 더 얹어 주셨다. B는 괜찮다는 말을 건넸지만, 선생님이 아닌 이나라 아이들을 위한 보너스라며 사장님은 누런 봉투에 붕어빵을 눌러 담아 주었다. 그 작은 호의가 주는 따스함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B는 코끝이 찡해짐을 느끼며 사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붕어빵이 가득 담긴 봉투를 외투 안에 집어넣어 끌어안은 채로 걸었다. 누런 봉투에서 퍼져 나오는 온기가 수험생 혹은 취준생으로 겪은 서러움을 달래주었다. (그 가게 단골이 되야겠다고 생각한 B였다.)



#결국 노량진


이튿날이 되고, 지난밤 숙취로 인해 B는 점심 무렵이 돼서야 일어났다. 식탁에 놓인 덮개를 열어보니 어머니께서 끓여놓으신 김치찌개와 몇몇 밑반찬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덮개에는 어머니께서 적어 놓으신 메모가 붙어있었다.


‘B야 고생했고, 엄마는 항상 널 응원해.’


B는 축하보다는 위로의 감정이 더 묻어나는 말처럼 느꼈다. 조금은 의아했지만, 당장의 숙취와 허기를 달램이 먼저였다. 식사를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제법 와 있었다. 익숙한 번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서울시 교육청이었다. 수화기 너머 전화했던 곳이 교육청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불길처럼 치솟는 불안감에 B는 얼른 통화를 끊고,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 내용이 믿기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심장은 빨라지고, 역설적으로 피는 말라갔다. B는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교육청에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내용은 B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인터넷에는 임용고시에 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B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는 현실이라고 주입시켰다.

사실은 이랬다. 임용고시 성적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실수가 있었고, 그로 인해 접수 합산에 누락된 인원들이 있었다. 이들의 점수를 다시 취합하는 과정에서 최정 합격 커트라인이 0.33점 향상돼 158.33점이 되었다. B를 비롯해 7명가량의 수험생들이 합격 취소 연락을 받았다. B는 0.12점이 부족했다. 임용고시 합격 번복이라는 뉴스는 인터넷, 신문, 뉴스, 유튜브, SNS 등 각종 미디어에서 아침부터 다루어졌다.

잔인한 적막이 지나고 나니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조금 전 상황이 납득이 갔다. 어머니께서 남겨놓으신 쪽지, 조용한 스터디 단톡방. 여자 친구로부터는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전화가 왔다. B는 받지 않았다. 이들은 B보다 조금 일찍 이 소식을 접했다. B의 가족, 함께 준비해온 친구들, 여자 친구 모두 B의 최종 점수를 알고 있었다. 이들 모두 혹시나 하는 마음에 B에게 상황을 물으려 했지만, 우선은 기다리기로 했다. 애써 위로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B를 배려했다. 그간 B가 얼마나 노력했고, 그 간절함을 옆에서 지켜봐 온 이들이었기에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지 몰랐다. 그저 B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배려가 담긴 침묵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동정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초라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지난밤 숙취로 남들보다 조금 늦게 소식을 접한 자신이 한심했다.

임용고시 재수, 삼수는 기본이라고들 하지만 1,2번의 실패의 당위성이 실패의 아픔을 무마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사회는 한 청년이 어떤 실패과정을 밟아 왔는지 혹은 현재 진행형인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실패자, 불합격자, 탈락자, 백수, 빈손, 무직자. 한 사람의 자아상을 소름 끼치도록 깔끔하게 정의해 주는 이 자아상들만이 B의 수식어였다. B는 이번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때로는 잔인한 현실보다, 현실과 관계없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이 더욱 잔인하게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현실은 잔인한지도 모른다. B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갔다. 여자 친구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지방의 사립학교 면접을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B도 처음에는 솔깃했지만, 이내 거절했다. 현 상태에서 사립학교 도전은 대안보다는 회피에 가깝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면접에 합격할 자신이 없었고, 연이은 불합격을 견딜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합격한다 한들 어느 정도 여자 친구 덕을 봤다는 사실을 떨쳐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B는 노량진으로 향했다.

계약한 원룸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노량진 수험생활이 시작될 터였다. 원룸으로 들어서기 전 망설임이 일었다. 그 문을 여는 순간 다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험생으로서 버티고 살아야 했기에 조금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1 ~ 2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B가 문을 열려고 할 때 낯선 남자가 그 집에서 나왔다. 주인집 아주머니로부터 이전 학생이 오전에 집을 들릴 것이라고 들었다. 아주머니는 그가 놓고 온 짐을 가지러 잠깐 들리는 것이라 했다. B는 아주머니 말을 듣고 오후에 입주할 생각이었다. 점심이 한참 지난 시간에 집으로 향했지만 B는 원하지 않던 만남을 해야 했다. 큰 키였지만 몸에 근육은 하나도 없는듯한 몸매의 남자였다. 굵은 뿔테 안경과 지저분한 머리, 군데군데 면도가 덜 된 수염을 보니 이 남자도 수험생이었다. 수험생활은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더니 남자는 40살 가까이 보였다. 학생보다는 선생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 남자는 노량진에서 10년간 수험생활을 했다. 25살에 꿈을 가지고 입성한 청년은 연금하나 만 바라보는 아저씨가 됐다. 35살의 나이는 학생으로 불리면 안 됐었다. 배우는 사람이었지만 학생이라 불릴 자격은 되지 않았다. 10년간의 준비 끝에 합격한 그는 앓던 이 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10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쑥 내려앉았다. 합격하기 전 노량진을 떠나게 된다면 시원섭섭할 것 같았지만 섭섭함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후련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그는 10년간 자신이 살아온 원룸에 짐을 찾으러 다시 들린 그날 마음 한 편의 섭섭함을 마주했다. 10년의 세월 동안 그는 노량진의 3대 명물이 됐다. 매일 아침 육교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 베로스. 수험생들의 힐링푸드인 컵밥. 그리고 전설의 10 수생(사실 그는 9 수생이었다). 그는 짐만 챙겨 바로 떠나려 했지만 막상 방을 나서기 쉽지 않았다. 그는 4.5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서 선생님 하나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그제야 마주했다. 미운 정 가득한 곳을 떠나는 섭섭함은 없었다. 그저 하나만 보고 달려오느라 스스로 보살피지 못한 과거를 마주하니 어느덧 과거의 자신과 그간의 섭섭함과 미안함을 주고받고 있었다. 방구석 구석 붙여놓은 암기 내용, 김치만 가득했던 냉장고, 서러움을 달래기 위해 베개를 부둥켜안았던 방 한켠. 그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이제는 자신을 돌보며 살라는 말을 건네들 었다. 그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그는 방을 나서기 쉽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집을 나서는 순간 집 앞에서 젊은 청년을 만났다. 아마 자기 다음에 이 집을 사용할 수험생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 해 격려와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저 짐 챙기느라 늦었다는 말을 건네며 미리 비워주지 못해 미안하다 했다. 그저 속으로 그 청년이 자신처럼 괴롭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I am nothing


B의 생활은 어제로 가득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이고 내일도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다. 처음 한 달은 매주마다 여자 친구가 B를 찾아왔지만 B는 이후 찾아오지 말라했다.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B의 삶은 어제로 채워졌다. 한 달에 한 번은 본가에 갔다. 부모님은 와서 푹 쉬고 가길 바랬지만 B는 스스로 눈칫밥을 먹었다. B의 부모님도 이런 B의 심정을 알고 있었기에 항상 따스하게 반기려 했지만, B의 죄책감이 안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번은 집에 들러 얼굴만 비치고 곧바로 노량진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집으로 향하는 것보다 노량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 가벼웠다. 임용고시 3 수생 백수 입장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일종의 귀향길로 여겨졌다. 귀향길에서 마주해야 하는 붕어빵 가게는 B의 귀향길을 더 힘들게 했다. B는 매번 길을 돌아갔다.

다행스럽게도 B의 성적은 상당히 우수했다. 매번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 및 모의 면접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B와 같이 수업을 듣는 몇몇 수험생과 학원 강사들은 B가 애초에 노량진에 왜 왔는지를 의아 해 하기도 했다. B의 실력과 경험이면 독학과 스터디 모임만으로 충분히 합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를 B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량진을 떠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만이 실패자가 견뎌야 하는 무게라 생각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법이었다. 어느덧 임용고시 공부는 합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30살에 명함 하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부터 받는 선망과 기대 속에서만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었다. 우물 안에서 느끼는 편안함에 익숙한 개구리는 우물을 벗어날 수 없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어쩌면 머리카락보다 얇은 외줄 위에 겨우 서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외줄이 끊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 사람이 보여주는 성실함이 꿈을 향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목표를 향한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다시 또 실패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어쩔 수 없이 버티는 것인지. B는 버팀과 성실 사이의 간극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본 모의고사에서 B는 2등을 했다. 1등과는 종합점수 0.1점 차이였다. 개구리의 안락함에 균열이 생겼다. B는 지난번 불합격 이후로 일종의 강박이 생겼다. 0.12점 차이로 떨어진 B였기에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다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씻었던 손을 다시 씻고, 몇 번이고 확인한 문제를 재확인했다. 학원에서 늘 앉던 자리에 앉지 못한 날은 하루 종일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모의고사 등수가 밀린 이후로 불안감은 커지다 못해 증폭했다. 마치 곧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물이 새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한 달 여가 지나고, 다시 치른 모의고사에서 B는 10등 밖으로 밀렸다.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흐른 만큼 다른 수험생들의 성적도 향상되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B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도 1등을 하지 못한다면 실전에서는 소수점 차이로 떨어질 수 있었다. B는 더욱 악착같이 공부했다. B가 집중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B가 무섭다 했다. B의 눈빛에는 독기와 살기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B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었다. 1등을 하지 못한 자신에게 내릴 수 있는 벌을 부여하고 있었다.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려 하면 자신의 죄목을 상기시켰다. 무직, 백수, 3 수생, 낙오자, 실패자라는 죄목으로 스스로의 족쇄를 찼다. 고문 집행인이자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다시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고, 임용고시 필기시험이 1달 남은 시점이었다. 학원에서 보는 마지막 모의고사였다. B는 다시 1등을 차지했다. 이후 날씨가 제법 쌀쌀해질 무렵 임용고시 1차 필기시험날이 다가왔다. 전날 여자 친구로부터 응원 메시지가 왔지만 B는 답장하지 않았다. 최종 합격 후 당당하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아직 그는 당당하지 못했다. 1차 필기는 무난하게 치러졌다. 필기시험 이 끝나는 시점까지 B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1차 합격 발표까지는 기다려야 했지만 필기시험은 합격이 틀림없었다. B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2번의 1차 시험에서도 B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B는 필기시험이 끝나고 노량진이 아닌 집으로 향했다. 2 ~ 3일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노량진에서 2차 면접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집 앞 골목에는 여전히 붕어빵 가게가 있었다. B는 돌아가려 했지만 피곤한 나머지 가게 앞을 앞질러 갔다. 붕어빵 가게 사장님과 눈을 안마 주치는 일은 의외로 쉬웠다. 한 숨 돌린 B는 집에서 푹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작은아버지가 와 있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려 B의 부모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B는 작은아버지가 불편해 인사드리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여자 친구에게 연락해볼까 싶었지만 이내 핸드폰을 다시 내려놨다. 2시간여의 시간이 흐르고 작은아버지가 간다는 말에 현관으로 나와 배웅 인사를 드렸다. 작은아버지는 B에게 용돈을 건넸다. B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작은아버지의 오지랖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젊으니까 괜찮아.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도 앞으로 해 나가면 돼.”



#이혼사유


사용한 물컵을 제자리에 놓지 않은 것이 이혼사유가 된다. 거대한 댐이 개미구멍 하나에 무너진다. 업화의 분노와 불안은 말 그대로 별 것 아닌 것이 촉매가 되어 일어난다. 뒤통수 어딘가에 있는 어떤 끈이 싹둑 잘려 나간다. 작은아버지는 이야기에 어제는 없었다. 어제 무엇을 했던 오늘 취준생이면 그것이 작은아버지가 내린 B에 대한 정의였다. 서사도 역사도 이야기도 과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공부하고, 과외를 하고, 동료들과 면접 준비를 하고, 잠을 줄여가며 자신을 다독이고, 매월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자신을 감추고 숨기며 살아온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룬 것은 없지만 나름 악착같이 성실하게 살아왔다 생각한 B였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한 인간이었다. 그간의 경험에서 얻은 생각과 감정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무것도 안 한 인간이니 경험이라고 부를 것이 없었다. 개인의 경험은 사회에서 인정해준 자격, 신분, 타이틀을 달았을 때 인정받는다. 그 인정을 받기 전까지 누군가의 경험은 그저 시간낭비, 방황, 쓸데없는 짓으로 불릴 뿐이다. 아르바이트를 하여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취업에 성공해야 아르바이트 경험이 된다. 아니면 그저 용돈 벌이다. 여행을 다녀와도 그 경험을 살려 직장에서 활용해야 경험이다. 아니면 그저 놀러 다녔을 뿐이다. 봉사활동 또한 그 경험이 이력서에 첨부되고, 서류심사에 반영이 되어야 경험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잘 못 선택한 스펙 쌓기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 앞에서 한 개인이 쌓아온 서사는 개성, 자아, 철학을 잃어버린다.

아무것도 안 한 인간이었다. B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작은아버지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한 인간이겠구나 생각했다. 작은아버지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놀랄 것은 없었다. 하지만 가연성을 지닌 불안감에 불이 붙은 이상 이 불길은 쉽게 사그라들 기미가 안보였다. 내면의 거울에게 끊임없이 아무것도 안 한 인간인지를 물어봤고,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자아는 그간의 과거를 비추어 주었다. 거울이 비추는 과거 자신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는 것 같았지만 정신 차려보면 현실이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인간이라는 현실이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어쩌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미 B 또한 자신을 아무것도 못 한 인간으로 생각했던 것일지 몰랐다. 열정과 희망을 바탕으로 공부해 본적이 언제였을까? 공부는 죄책감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도피처였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의 죄책감이었을까? 수험생, 무직, 30 무렵의 학생. 이중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말고 1년 빠르게 임용을 준비했으면 지금쯤 교단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까? 고전문학을 읽으며 과거의 현인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자 했던 시간 대신 교육학 서적을 한 번 더 봤다면 필기시험 점수가 1점은 더 나왔을까? 그래서 합격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을까? 아니 번복된다 하여도 자신은 여전히 경계선 안쪽의 성공한 무리에 속했을까? 방학 때마다 봉사활동을 하는 대신 면접 스터디를 했다면 면접 점수가 더 높게 나왔을까? 그날 임산부와 순번을 바꾸지 않고 면접을 봤다면 조금 더 좋은 컨디션으로 면접에 임했을까? 그래서 붕어빵 사장님에게 “저 합격했어요”라는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합격 번복의 소식을 먼저 접하고 자고 있는 아들을 위해 묵묵히 슬픔을 삼키며 아침을 준비하시던 어머니의 애환을 덜어드릴 수 있었을까?

타인의 서사 따위는 무시하는 그 무례한 한마디가 화살이 되어 깊은 상처를 남기고, 이 상처가 타인의 무례함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 본인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게 된다.

굳건하다 믿은 신념은 현재의 상황 앞에서 그 굳건함을 잃어버린다. 어쩌면 순식간에 무력해지는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포장하기 위해 신념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나 보다.

지난 1년간의 시간에서 비롯된 번아웃(burn out)이 아니었다. 3 수생 활동 안 아니 어쩌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이어온 나날의 번아웃 일지 몰랐다. 문제는 아직 2차 면접시험이 남아 있었다. 불안감에 휘둘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B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노량진으로 향했고, 본격적인 2차 면접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합격해야 한다 생각했지만, 그날 이후 B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모의 면접을 하는 동안은 괜찮았지만 잠시라도 생각의 공백이 발생하면 그 틈새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비집고 들어왔다. B의 마음에 진공상태는 허락되지 않았다. 불안감이라는 괴물이 자신을 잡아먹게 둘 수는 없었지만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 괴물의 식욕을 잠시나마 멈출 수 있는 시간은 모의 면접을 볼 때뿐이었다. 그간의 노하우가 제법 쌓인 B는 기계처럼 면접을 수행했다. 막힘없이 수업시연, 기타 면접 질문 등을 토해냈다. B의 주변인들은 가끔 B가 면접에 집중하는 모습이 무서워 보일 때도 있다 했다. 강사들은 B가 호랑이 선생님 혹은 독사가 될 것 같다는 농담을 건넸다. B 또한 자신이 면접을 보는 순간만큼은 다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집중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렇게 불안감이라는 괴물과 공존한 채로 면접날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生


아직은 꽃샘추위가 덜 가셨지만 나름의 쌀쌀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아침이었다. 벚꽃이 제법 떨어졌지만 아직은 그 화려함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 벚꽃을 지붕 삼아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뭐가 즐거운지 해맑은 미소를 띠며 벚꽃보다 더 환한 수다를 꽃피웠다.


“아… 오늘 꼰크랑 면담이야.”

“매점에서 간식 잔뜩 먹고 가. 담임이랑 면담하고 나면 온 에너지가 다 빨리거든.”


이 학교에는 전설적인 존재가 있었다. 늘 열정과 애정으로 가득 찬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 있었다. 이 선생님은 학교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늘 아이들의 상담일지를 읽고, 아이들의 관심사를 공부했다. 매일 아침 운동을 마치고, 상쾌한 마음자세로 아이들을 맞이했다. 교내 축구대에서 그 선생님 반 학생이 골을 넣었을 때 그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며 기쁨을 표현했다. 아이들의 잘못을 엄중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꾸짖을 줄 아는 어른이었다. 아이들에게 훈계를 하고 나면 늘 자신이 감정에 휩쓸려 실언은 하지 않았는지 반성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좋아했다. 몇몇 아이들은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가끔은 선생님의 과한 관심과 조언이 부담스러워 꼰대스럽기도 했다. 선생님은 고전에서 얻은 지혜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달하기 위해 매일 고민했다. 이러한 선생님의 노력을 알고, 선생님의 보살핌에 애정을 느낀 아이들은 이 열정 넘치는 교사에게 꼰대 대신 꼰크라데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루는 졸업한 학생이 찾아왔다. 작년에 졸업 후 재수학원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 1년이 지난 후였다. 성실하고, 학업 성적도 우수한 학생이었기에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지만 반대였다. 그 학생은 이번에도 지원한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집에서는 3수를 시킬 생각이었고, 그 학생 또한 별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수긍했다. 다만 본인이 3수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3수를 한 후에도 또다시 낙방하면 어떻게 할지. 본인만 뒤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커지는 와중 선생님을 찾게 됐다 했다. 묵묵히 제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생님은 대학시절 친구의 이야기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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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날이 다가올수록 B의 불안감은 커졌다. 3일 정도 남았을 무렵 평소와 마찬가지로 모의 스터디로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와 잠을 청했다. 사실 작은아버지와의 만남 이후부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면접날 깔끔한 인상을 주어야 했기에 적절한 수면과 컨디션 관리는 필수였다. 다만 침대에 누울 때면 불안감이라는 괴물은 B의 잠을 방해했다.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잠을 청하기 힘들었다.

B는 문득 임용고시 커뮤니티가 생각났다. 그곳에서 여러 합격수기 등을 읽으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이런저런 합격 수기, 위로와 응원의 글 등을 읽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느덧 1년 전에 올라온 게시글까지 읽고 있는 B였다. 그러다 문득 한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요와 댓글이 제법 많았다.


제목: 우리 아이가 엄마 축하해주려고, 면접날에 태어났나 봐요.


내용: 안녕하세요. 이 글이 선생님(당연히 합격하셨을 거라 믿고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께 닿을지 모르겠지만 꼭 만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저는 취업하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습니다. 지금에서야 그때 왜 그렇게 나를 몰아붙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지나친 간절함이 독이 되어 저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루하루 힘들어하며 매일 도서관과 집을 오가던 중 우연히 한 선배와 만나게 됐습니다. 그 선배 또한 취업준비를 하는 시기가 길어지면서 많이 괴로워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선배가 해준 말이 있었어요.


“세상 대부분의 직업에는 무슨무슨 자(者), 가(家), 인(人), 사(師), 님 등으로 그 직업의 호칭을 불러. 의사, 변호자, 작가, 연출가, 요리사, 정비사, 선생님 등. 근데 취업 준비원, 취업 준비님, 취업 준비분, 취업 준비 선생님, 취업 준비인, 취업 준비가, 취업 준비사라는 말을 없더라고. 오로지 준비생(生)이라는 말만 있는 거야. 왜 그럴까 궁금해서 찾아봤지. ‘生’ 자는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본떠 유래됐다 하더라고. 그래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 태어나다, 살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래.”


저는 특히 ‘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모두가 채움을 강조하는 이 시기에 취업준비생은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분명 오늘 하루도 열심히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 다가간 모두가 처절하게 살아왔고 자신의 서사를 채워온 사람들일 텐 대요. 자신의 역사와 서사가 가득 해지는 경험을 쌓고 있는 시기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죽은 듯이 살아가는 취준생, 수험생들이지만 언젠가 지금의 경험이 타인을 살아가게 할 힘을 주는 이야기가 될지 모릅니다. 제 아이도 누군가의 취업 준비 과정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래서 취업준비생이라는 말은 생생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스스로를 절제하며 조금씩 노력하는 준비생 모두가 생생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멋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결과로 평가하겠지만 그것이 한 개인의 과정과 서사를 송두리 채 무시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제 아내 또한 준비하면서 많이 힘들어하다 보니 조금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된 것 같아요. 그냥 지나가는 아저씨가 너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런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나이 먹으니 오지랖만 느는 것 같네요.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아내와 아이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약 1년 전 B가 면접을 봤을 때 번호표를 교환해 준 그 임산부 이야기였다. 혹시 다른 분일까 하였지만 면접 일시와 장소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분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아이디로 글을 올렸다.


그녀는 예정일이 지난 상황이었다. 언제 양수가 터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면접장으로 향했다. 면접 도중 진통이 오기 시작해 이 기회를 날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런 스트레스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면접 순서가 앞쪽이기를 바랐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18번을 뽑았다. 제일 마지막 번호였다. 옆에 있는 대기 생들에게 번호 교환을 부탁했지만 모두가 거절했다. 걱정이 앞서던 와중 한 청년이 그녀에게 먼저 번호 교환을 요구했다. 덕분에 임산부는 그날 제일 먼저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면접이 끝나자마자 대기실에 들려 그 청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싶었지만 청년은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집으로 향하며 감사하다는 말이 그 청년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용고시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있었다. 글을 올리던 와중 진통이 시작됐고, 그 길로 병원으로 향해 순산할 수 있었다. 며칠 뒤 그녀는 마무리하지 못했던 감사 글을 남편과 함께 올렸다. 그녀와 남편은 그 청년이 꼭 합격했기를 바란다며, 그 청년 덕분에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고 글을 올렸다. 그러한 친절함을 갖춘 사람이 꼭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겠다 했다. 그녀의 남편 또한 이 글이 그 청년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신의 아이가 조금 더 자랐을 때 그 청년 같은 선생님을 만났으면 좋을 것 같다 했다. 아무것도 안 한 인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 여긴 내가 한 생명이 무사하게 태어나는데 일조했다 생각하니 헤아릴 수 없는 위로가 몰려왔다.

B의 꿈은 B가 잘나지 못한 첫 번째 이유가 됐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혼나는 첫 번째 이유였다. 스스로를 가두는 족쇄가 됐다. 나라에 헌신한 2년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떠난 배낭여행 시기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대학교를 졸업하는데 8년씩이나 걸린 게으른 청년이고, 이제는 임용시험을 3년씩이나 준비하는 집안의 애물단지였다. 불합격에도 돌아갈 곳은 임용 고사장뿐이었다. 자신의 삶은 B급 인생도 되지 않는다 생각하며 스스로 지난 과거를 원망하였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런 선택을 한 과거의 자신을 미워했다. 나란 인간은 쓸모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점점 커져왔다. 지난날의 과거는 실패와 후회로 가득했다.

이런 나 같은 인간도 누군가는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한다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실패로 점철됐다 생각한 과거 속에도 자신의 작은 호의가 선한 영향력을 펼쳤다 생각하니 자신을 향한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언젠가 그 아이가 자랐을 때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바람을 해본지가 언제였는지 몰랐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일이 이렇게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었나 싶었다. 아직 선생님이 되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안 한 인간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자신도 나름의 서사와 역사를 쌓아왔다 생각할 수 있었다. 준비하는 시기는 살아있는 시기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 또한 살아온 삶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 않았다. B는 살아왔다. 그 견딤의 시간이 생생하게 살아오고, 처절하게 버티며 자신의 역사를 묵묵히 쌓아온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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