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자존감에는 날개가 없다1

#우연과 인연 사이

by Ted 강상원

#우연과 인연 사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내가 필리핀에서 어학연수하던 시절 제일 가깝게 지냈던 튜터였다. 필리핀에서 공부하던 시절엔 친한 친구이자 튜터와 학생으로서 정을 쌓았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친해졌지만, 이성으로 느끼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슬하에 아들과 딸 하나씩 있는 유부녀였다. 하루는 내가 농구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자신의 남편이 농구하는 곳으로 초대했다. 이후 주말마다 그 친구의 남편, 남편의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하며 남편과도 가까워졌다. 즐거웠던 필리핀 생활이 끝나갈 무렵 나는 그동안 고마웠고, 보고 싶을 거라는 편지를 건넸다. 직접 읽어달라는 그 친구의 말에 쑥스러워서 장난치는 듯이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은 후 그 친구를 봤다. 그 친구는 내가 보고 싶을 거라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2주 정도 남겨두었을 때쯤 그 친구의 고향으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그 친구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필리핀을 떠난 후 그 친구와 나는 가끔 안부를 물어보며 지냈다. 대부분의 인연이 그렇듯 그 친구와 나도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필리핀에서의 추억을 간직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호주에서 농장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1년 정도만 호주에 있을 생각이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삶이 조금은 외로웠을까? 하루는 문득 그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메시지가 불러올 나비효과를.


그녀는 남편과 별거 중이고, 혼인무효 선언(annulment) 절차를 밟고 있다 했다. 안타깝게도 남편이 그녀를 놔두고 바람을 피웠다. 게다가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편 좋은 기회로 일본의 한 사설 교육 기관에서 외국어 강사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했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께 잠시 아이들을 부탁하고, 일본에서 취업할 계획이었다.


부부의 이별은 그들만의 아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헤어지는 과정에서 아이들도 상처를 입는다. 그녀도 이를 잘 알았기에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다만 그러한 최선이 그녀 자신을 돌볼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느끼는 상처를 돌보기보다 엄마로서 자식들의 상처를 더 보듬으려 했다. 그녀의 모성애는 자신의 아픔을 보살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위대해지기 위해 자신에게는 잔인해야만 했다. 자녀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따뜻함을 주기 위해 내면에 울고 있는 자신을 차갑게 방치해야만 했다. 자애(慈愛)가 두터워지는 만큼 자애(自愛)는 사치였다.


사랑이 우리를 치유해주는 듯 하지만 때로는 사랑 때문에 자신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한다. 상처가 깊어지고 고름이 나와 썩어 흉터가 될 때까지 사랑이란 말 또는 책임이라는 무게가 아픔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랑은 아픈 단어였다. 그녀는 스스로 그녀의 아픔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통을 애써 외면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녀에게 일본에서 온 제의는 감사하고, 좋은 기회였다. 다만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자식들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사랑이 아팠다. 엄마로서 힘들었다. 긴 고민 끝에 그녀는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쿡쿡 찌르는 감정을 견디며 살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수록 아들과 딸을 그리워했다. 아들과의 대화, 딸과 함께 부르던 노래가 그녀를 더 사무치게 했다. 매번 자식을 향한 그리움에 그녀가 훌쩍일 때면 어느새 나는 그녀를 웃게 하려 하고 있었다.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내가 필리핀에서 어학연수하던 시절 제일 가깝게 지냈던 튜터였다. 필리핀에서 공부하던 시절엔 친한 친구이자 튜터와 학생으로서 정을 쌓았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친해졌지만, 이성으로 느끼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슬하에 아들과 딸 하나씩 있는 유부녀였다. 하루는 내가 농구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자신의 남편이 농구하는 곳으로 초대했다. 이후 주말마다 그 친구의 남편, 남편의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하며 남편과도 가까워졌다. 즐거웠던 필리핀 생활이 끝나갈 무렵 나는 그동안 고마웠고, 보고 싶을 거라는 편지를 건넸다. 직접 읽어달라는 그 친구의 말에 쑥스러워서 장난치는 듯이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은 후 그 친구를 봤다. 그 친구는 내가 보고 싶을 거라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2주 정도 남겨두었을 때쯤 그 친구의 고향으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그 친구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필리핀을 떠난 후 그 친구와 나는 가끔 안부를 물어보며 지냈다. 대부분의 인연이 그렇듯 그 친구와 나도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필리핀에서의 추억을 간직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호주에서 농장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1년 정도만 호주에 있을 생각이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삶이 조금은 외로웠을까? 하루는 문득 그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메시지가 불러올 나비효과를.


그녀는 남편과 별거 중이고, 혼인무효 선언(annulment) 절차를 밟고 있다 했다. 안타깝게도 남편이 그녀를 놔두고 바람을 피웠다. 게다가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편 좋은 기회로 일본의 한 사설 교육 기관에서 외국어 강사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했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께 잠시 아이들을 부탁하고, 일본에서 취업할 계획이었다.


부부의 이별은 그들만의 아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헤어지는 과정에서 아이들도 상처를 입는다. 그녀도 이를 잘 알았기에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다만 그러한 최선이 그녀 자신을 돌볼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느끼는 상처를 돌보기보다 엄마로서 자식들의 상처를 더 보듬으려 했다. 그녀의 모성애는 자신의 아픔을 보살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위대해지기 위해 자신에게는 잔인해야만 했다. 자녀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따뜻함을 주기 위해 내면에 울고 있는 자신을 차갑게 방치해야만 했다. 자애(慈愛)가 두터워지는 만큼 자애(自愛)는 사치였다.


사랑이 우리를 치유해주는 듯 하지만 때로는 사랑 때문에 자신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한다. 상처가 깊어지고 고름이 나와 썩어 흉터가 될 때까지 사랑이란 말 또는 책임이라는 무게가 아픔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랑은 아픈 단어였다. 그녀는 스스로 그녀의 아픔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통을 애써 외면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녀에게 일본에서 온 제의는 감사하고, 좋은 기회였다. 다만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자식들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사랑이 아팠다. 엄마로서 힘들었다. 긴 고민 끝에 그녀는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쿡쿡 찌르는 감정을 견디며 살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수록 아들과 딸을 그리워했다. 아들과의 대화, 딸과 함께 부르던 노래가 그녀를 더 사무치게 했다. 매번 자식을 향한 그리움에 그녀가 훌쩍일 때면 어느새 나는 그녀를 웃게 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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