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리뷰 시리즈 (5)

『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5-7 요약 설명 part 1

by Juncus

1. 『정의란 무엇인가』 chapter 5-7 요약 설명 part 1

1) 임마누엘 칸트와 존 롤스

이번 회 차부터는 2주에 걸쳐 『정의란 무엇인가』 5장-7장에서 다루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해 요약 및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샌델은 이 소주제를 두 명의 저명한 철학자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며, 두 번째가 존 롤스입니다. 둘 다 매우 유명한 인물들로 이 이름들을 누구나 한 번쯤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연대순으로 따진다면, 칸트가 롤스보다 앞선 세대로, 샌델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 중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외하면, 벤담과 더불어 가장 오래전에 활동한 철학자입니다. 하지만 오래되었다고 해도, 근대의 인물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뉴턴 이후 계몽주의 시기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존 롤스는 현대의 철학자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한, 두 세대 정도 전에 활동한 학자로 철학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는 거의 동시대 철학자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리고 샌델이 구성한 순서에 따라, 이 두 철학자들 중 이번 회 차에 요약·설명드릴 인물은 바로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칸트 하면 3개의 비판서로 매우 유명합니다. 그것은 각각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비판』입니다. 이 책들은 지금 나열된 순서대로 작성되어 발표되었습니다. 이 말인 즉, 이 순서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순서가 중요하다는 말은, 이 각각의 이성들이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며, 여기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각 이성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이성들을 유기적으로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각 이성들은 그것이 작용하는 대상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됩니다. 먼저 ‘순수이성’은 ‘인식’ 즉 ‘지식을 얻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천이성’은 ‘순수이성’을 통해 알게 된 ‘올바른 지식’을 윤리적 행위와 연결시키는 이성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판단력’은 미(美)에 대한 가치 판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이 각각의 비판서는, 위에 나열된 순서대로 보았을 때, 각각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미학’이라는 철학의 하위 범주에 관한 기본 비판서들입니다.


이 세 개의 비판서 중 샌델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실천이성비판』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란 무엇인가』 자체가 윤리학을 다루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배경지식은 이 정도로 소개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샌델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요약·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1) 임마누엘 칸트

⓵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

샌델은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합니다. 도덕의 기준을 사람들의 흥미와 기호에만 둔다면 “계산에만 밝은 사람이 되게 한다.” 이 말인 즉, 공리주의적 가치관은 도덕의 가치를 훼손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법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부연하자면 공리주의와 칸트의 입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행위의 ‘결과’에 두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리주의에 경우, 결과적으로 많은 효용을 불러오는 행위는 선(善)하다고 보지만, 칸트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는 도덕을 우연에 맡기는 꼴일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칸트 철학에서 ‘의지’, 다시 말해 ‘선(善)의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행위의 동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동기란 결코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것이며, 또한 그래야만 하는 것, 그것이 칸트의 정언(定言, categorical) 철학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정언(定言, categorical)’이라는 말의 뜻은, ‘만일’ 등의 조건이 결부되지 않고, 언제나 매우 확실하고 단정적인 명제를 의미합니다.


⓶ 도덕의 기준


위에 설명드린 내용을 이해하셨다면,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기준이 무엇인지 파악하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칸트는 도덕의 기준을 공리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칸트에 따르면, 개개인의 감정의 기반을 둔, 기호(嗜好)와 바람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즉 ‘순수이성’과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 즉 ‘실천이성’ 사이의 연관성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도덕의 기준이 시작됩니다.


⓷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칸트에 의하면, 만일 이 명제적 문장이 참이라는 진리치를 담지한 것이라면, 그 근거는 ⓶에 따라 도출됩니다. 즉, 인간이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첫째, 이성적 사고력, 즉 순수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 순수이성의 명령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 즉 실천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단, 이 두 조건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게 주어진 것이 아닌, 타고난 가능성으로서의 공통점일 뿐입니다.


이게 처음부터 모든 인간 각자에게 완전하게 주어진 것이면, 세상에 부조리, 비도덕, 범죄, 사기 등은 전혀 일어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계몽주의적 믿음이 사실이라면, 모든 인간은 칸트가 말하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타고났지만, 이 가능태를 현실태로 실현시키는 의지, 곧 선의지와 그 내용으로서의 자율성(autonomy)은 또 다른 역량으로서 인간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게 칸트의 주장인 것입니다.


한편,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라는 믿음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을 포함한) 자유주의 진영과 공리주의 진영 중 어느 쪽이 더 강하게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물론 자유주의 진영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전개된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신 분이라면 누구나 납득하실 겁니다. 하지만 똑같이 ‘자유’를 중시하는 입장이라도, 칸트의 생각과 노직의 생각은 또 다릅니다. 즉, 샌델이 설명한 대로, 노직은 인간의 ‘자기 소유 개념’을 근거로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하지만,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근거로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와닿지 않으신 분들은 지난 회 차에 제시한 ‘상업적 대리 출산의 사례’에 대한 두 입장의 차이를 다시 한번 찾아 읽어보세요. 그러면, 확 와닿으실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노직과 같이 ‘자기 소유 개념’을 근거로 드는 입장은 아마도 분명,


내가 나의 소유물을 중시하듯이, 남들도 그들의 소유물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이런 나의 권리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나 역시 타인의 소유권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라면, 타인 역시 그들 자신의 주인이다.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라는 걸 보장받기 위해서는 타인 역시 그들 자신의 주인이라는 걸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논리의 외연을 확장시키면,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즉, 일종의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성경』에도 나오는 전통적인 도덕적 믿음의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곧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또 다른 전통적인 도덕적 믿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즉, 이 입장에서 볼 때 남의 고통을 보고도 그것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그 자체로 비도덕적인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때 그때만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칸트의 경우는 다릅니다. 칸트는 위의 『성경』에서 인용해 온 두 가지 경우 모두를 실천할 때만이 비로소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보며, 이 두 가지 경우 모두를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칸트가 주장하는 그 근거는 바로 인간은 누구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타고났기에, 무조건적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과 동시에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목적적으로 대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⓸ 칸트의 자유: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게 하라.”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자유’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샌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매우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천성 또는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닌, ‘준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

여기서 ‘준칙’이란,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게 하는 것, 그것이 실천이성의 목적이자 이 목적을 실현하는 능력으로서의 자율성(autonomy)의 내용이라고 칸트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그 유명한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에 타당하도록 하라.”라는 정언 명령입니다.


한편,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는 말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미 눈치들 채셨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자율(autonomy)’입니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이 ‘자율성’, 즉 오토노미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순수이성이 실천이성으로 이어지는 선의지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앎이 올바른 행위로 이어진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흔히 도덕 교과서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들 이 말을 이렇게만 이해합니다.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배워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으로는 잘 옮기지 못한다. 그것에 대해 경계하라는 말이 곧 ‘지행합일’이다.


라는 정도로만 말입니다.


물론 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만으로는 ‘지행합일’의 의미가 온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지행합일의 본래 의미는,


무언가 옳은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만 하고, 올바른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감각이나 습관, 관습에 의한 편견이 아닌, 사태 혹은 사물을 최대한 온전히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대로 된 지식 없이는 올바른 도덕도 없다.’라는 게 이 말이 본래 뜻입니다. 철학사에서는 이런 입장을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부릅니다. 이 연원은 매우 깊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그 대표적인 철학자이지요.


칸트는 이성과 감성의 종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는 약간 결이 다르지만, 아무튼 순수이성을 통해 얻은 가장 온전하다고 여겨지는 지식, 즉 보편 법칙이 그대로 도덕적 행위의 준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리고 이 준칙을 법칙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능력, 그것이 곧 ‘자율성(autonomy)’입니다.


샌델이 정리한 것에 따라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를 위해 배경지식으로서 알고 계셔야 할 것은 칸트는 뉴턴(네, 맞습니다. 그 물리학자 ‘뉴턴’을 말하는 것입니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자율성’이라는 개념 역시 ‘타율성’이라는 물리 법칙과 유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자율(autonomy)은 타율(heteronomy)과의 대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타율 개념과 관련해서 샌델이 소개하고 있는 중력법칙의 예를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낙하하는 것은 중력 법칙의 영향을 받는 것이며, 이는 타율적인 것이다. 그래서 만약 내가 낙하하다가 어떤 사람하고 충돌해서 그 사람이 죽게 되었을지라도, 이는 타율적인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결과이므로 도덕적 책임을 묻을 수 없다.’

⓹ 칸트의 도덕

이제 위에서 소개한 두 개념, 즉 ‘자율’과 ‘타율’의 대조를 통해 칸트가 말하는 ‘도덕’이 무엇인지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 즉, 칸트가 말하는 ‘도덕’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율적 동기 중시: 중력의 법칙과 같은 타율적인 결과나 천성이나 습관과 같은 경향성의 결과로 인한 행위는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설사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는 도덕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율성, 즉 선하고자 하는 의지의 동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무 중시: 이는 이 자율적인 동기가 보편 법칙에 부합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앞에서 인용한 유명한 정언 명령적 문장을 떠올려 보세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하라.”

이번 회 차는 여기까지입니다.

지난 회 차까지 진행된 내용들에 비해 조금 더 어려우셨지요?^^; 칸트를 쉽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음 회 차에는 존 롤스에 대한 설명입니다. 어렵기로 따지자면 이것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갈게요.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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