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남자 겨울 스웨터

그리운 나의 아빠

by 해그해그


겨울방학 중이었지만 늘봄교실에 가는 첫째를 위해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두꺼운 스웨터를 꺼냈다.


"이거 입고 가, 오늘 춥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점퍼 안에 입기엔 너무 두꺼워 활동하기 불편하다며 아이는 잔뜩 짜증을 부렸다.


"그래, 정 불편하면 벗어."


결국 아이의 고집에 항복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복도 너머로 마주한 아침 공기는 제법 매서웠고 살을 에듯 차가웠다. 아이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아, 추워! 엄마가 입으라는 옷 입을걸 그랬어요"


하고 뒤늦은 후회를 내뱉었다.


나는 "어이구, 이 녀석아. 엄마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니까"


하며 아이를 학교로 들여보냈다.

아이를 보내고 돌아와 거실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아이의 스웨터를 집어 들었다.


아직 아이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도톰한 편물을 차곡차곡 개는데, 문득 가슴 한편이 아릿해졌다.


손끝에 닿는 이 보풀 거리는 촉감 위로,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아빠의 하얀 스웨터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타닥, 타닥...


언제부터였을까?


불길 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실타래가 검게 그을려 조각이 되고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온기를 품었을, 아니 온기를 품어주길 바랐던 나의 첫 선물이 그렇게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아빠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굳은 입술이다. 간이 좋지 못해 검게 변해버린 아빠의 입술. 나는 립밤을 가져다 대며 아이처럼 가르쳤다.

"아빠, 이렇게 움파 움파, 윗입술이랑 아랫입술을 붙였다 떼면서 바르는 거야." 하지만 아빠는 끝내 그 쉬운 '움파 움파'를 해내지 못했다. 이미 굳어버린 그 입술은 딸의 애교 섞인 잔소리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다.

"아빠랑 수건 같이 쓰지 마, 컵도 따로 써라." 엄마의 그 말은 아빠가 오래전부터 앓아온 '비형 간염 보균자'라는 낙인이었다. 술 때문이었을까,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아빠는 내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밤마다 술을 드시러 나가던 그 일상적인 뒷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병원에서는 연구를 위해 부검을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어린 내 마음에는 그저 아빠의 몸을 온전히, 깨끗하게 보내드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못난 딸이었을지 몰라도 가시는 길만큼은 험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와 그 후의 기억은 안개처럼 흐릿하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을까. 학교에서 보내준 직업 연계로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던 나는, 생애 첫 월급을 탔다. 그 어린 나이에 고생해서 번 돈으로 홍성 터미널 근처에서 만 원을 주고 산 것이 바로 그 하얀 남자 스웨터였다.


아빠는 그 싸구려 옷을 입지 않고 서랍장에 예쁘게 개어 두셨다. 다른 유품은 없어도 그 스웨터만큼은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왜 그리 소중하게... 그거 엄청 싼 건데. 막 입어도 되는 거였는데."


결국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그 하얀 스웨터도 유품을 태워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불길 속으로 던졌다. 아빠는 왜 그 옷을 아꼈을까. 단순히 당신의 스타일이 아니어서였을까, 아니면 열일곱 살 딸이 일찍부터 사회에 나가 고생하며 번 돈으로 사준 그 마음이 너무 아까워 감히 몸에 걸치지도 못했던 걸까.


마지막은 차가운 바다였다. 한 줌 남은 아빠의 흔적을 받아 들었을 때, 손끝에 전해지던 그 온기는 유독 뜨거웠다. 조금은 노란빛이 돌던 그 뜨거운 뼛가루가 바람을 타고 푸른 물결 위로 흩어졌다.


그때 내가 흘린 것이 눈물이었는지 콧물이었는지, 혹은 내가 서 있던 곳이 현실인지 아니면 긴 꿈속의 한 장면인지 지금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바다로 번져가는 하얀 가루를 보며, 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다. 목이 메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불꽃이 잦아든 자리에는 타다 만 검은 조각이 남았고, 바다 위로 흩어진 가루는 파도에 씻겨 내려갔다.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엉켜버린 기억이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타지 않은 만 원짜리 하얀 스웨터 한 벌과 머리가 아프도록 울었던 그날의 바다가 일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