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죄가 없어
아이들의 태권도 수업이 끝날 무렵, 학원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처음에는 벚나무인 줄로만 알았다. 봄날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모양이 하도 비슷했던 탓이다. 그러다 가지 끝에 맺힌 주황빛 열매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아, 저것은 살구나무였구나.
열매가 노랗게 익어갈 때쯤, 나는 아이들과 그 나무 아래 나란히 앉아보았다.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을 이끌어 함께 열매를 만져보고 관찰하던 그 평화로운 오후. 그 순간, 기억의 문이 장대비처럼 열리며 중학교 1학년의 그날로 나를 데려갔다.
중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장대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 속옷까지 속수무책으로 젖어가며 이사한 집 앞에는 으스스한 기운을 풍기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한여름이었지만 아무런 열매가 맺혀 있지 않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살구나무인 줄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나무는 한 해를 정성껏 맺으면 그다음 한 해는 반드시 쉬어가는 나무였다. 1년 동안 주렁주렁 열매를 터뜨리기 위해, 나무는 꼬박 1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영양분을 저장하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썼다.
꽃이 피고 살구가 익어가기까지 많은 계절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나무는 내게 사계절의 순환을 몸소 가르쳐주었고, 때로는 향기를, 때로는 추위와 아픔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 나무는 대체 어떤 날, 누구에 의해 이곳에 심어졌을까. 그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다는 어른들의 막연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볕이 좋은 날 평상에 누워 잘 익은 살구를 베어 물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줄기의 소리가 세상 무엇보다 시원하게 들려왔다. 가끔 살구의 단내를 맡고 모여드는 벌레나 벌들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벌이라도 나타나면 소스라치게 놀라 집안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돌이켜보면 그 불청객들이 그토록 기를 쓰고 몰려든 이유는 살구가 그만큼 달았기 때문이리라.
그토록 달콤한 열매를 맺기까지 나무는 얼마나 많은 고단함을 삼켜냈을까. 꽃을 피우고 속을 채우기 위해 간절히 기다렸을 햇빛과,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인내의 시간들. 나무는 묵묵히 그 힘듦을 버텨내며 비로소 자신의 단맛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나무에게 받기만 했다. 물 한 바가지, 햇빛 한 줌, 영양분 한 알조차 보태준 적 없었건만, 나무는 매번 크고 달큼한 살구를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아빠가 기다란 막대기로 가지를 툭툭 건드려 살구를 따주시던 날, 입안 가득 퍼지던 그 첫맛을 잊지 못한다. 약 한 번 치지 않고, 누구의 살뜰한 보살핌도 받지 않은 채 그토록 고운 열매를 맺어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할 따름이다.
나무 왼편에 놓여 있던 낡은 평상 또한 누가 그곳에 두었는지 모른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나는 몸을 뉘었고, 머리맡에 열매가 있었기에 따 먹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 거대한 나무는 높은 곳에서 우리 가족의 모든 아픔을 굽어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나무는 뿌리째 사라졌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선명히 박혀 있다.
가끔 꿈속에서 그 나무를 만난다. 줄기의 굴곡과 오묘한 향기까지 어제 본 듯 생생하다. 어린 시절,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줄기와 굵고 거대한 몸집은 나에게 으스스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잘게 부서져 내릴 때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땅 위로 쏟아지는 빛의 조각들을 보고 있으면,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상처 따위는 없는 듯이, 슬픔 같은 건 모르는 아이처럼 나는 그 빛을 좋아했다.
마음이 외롭고 상처받아 멍하니 앉아 있을 때면, 나무는 부서지는 햇살로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나도 너를 싫어하지 않아, 나는 늘 너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단다’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무의 진짜 마음이야 알 길이 없지만, 어쩌면 그건 위로받고 싶었던 나의 간절한 상상이 만들어낸 온기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풍경은 꽃이 피어날 때였다. 하얗고 귀여운 꽃봉오리가 탁 터지며 꽃잎이 쏟아져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밤이면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머금은 꽃들이 마치 겨울날의 함박눈처럼 고요하게 내려앉곤 했다.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가끔은 나의 유년 시절을 지탱해 준 힘이, 실은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던 나무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 거대한 나무는 여기에 뿌리내리고 싶어 내렸을까. 보고 싶지 않은 우리 집의 아픈 사연들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만 했을까. 때때로 모든 불행이 그 나무 때문인 것만 같아 원망스러웠던 날들이 있었다. 나에게 살구나무는 그리운 추억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살구나무를 사랑한 만큼 미워했다. 하지만 그 미움 속에서도 하얀 꽃봉오리를 보며 서툰 시를 적어 내려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황망히 이사하던 날, 그 시가 담긴 공책은 비와 눈에 젖어 찢겨 나갔고, 그 안에 적었던 문장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나무 아래서 시를 적던 그 순간의 마음만은 내 가슴에 또렷하게 박혀 있다.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살구나무는 죄가 없다.
나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안타까운 일들을 그저 묵묵히 서 있던 나무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흘러가야만 했던 운명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과 함께한 날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었던 살구나무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다.
살구나무는 알까. 네가 미웠고,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게 싫어서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네가 있어서 하얀 꽃향기 흩날리던 그 봄날에 내 가슴속에 작은 온기 하나가 피어날 수 있었다는 걸 말이다.
비바람에 찢긴 시 공책은 사라졌어도, 나무가 내게 준 향기와 햇살의 조각들은 여전히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 나를 다독인다.
너는 알고 있었으리라
나의 모든 날들을
너는 숨죽여 지켜보았으리라
나의 아픈 순간들을
그저 곁에서 바라보았을 뿐인데
나는 너를 원망했었다
나를 지켜주던 온기는 잊은 채
달콤한 과육의 맛도 잊은 채
애꿎은 미움만 쌓아 두었지
소리 없이 나를 안아주던
너의 마음을 미처 몰랐다
싫지 않다고, 그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가지 끝마다 흔들리며 축복했을 너이기에
이제 나는 달콤한 살구 한 입 베어 물던
그 기억으로 이 달디단 세상을
다시 한번 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