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학원 앞 놀이터는 아이들에게 작은 사회이자, 감정의 용광로다. 첫째와 막내를 데리고 나선 그날 오후, 평화롭던 공기는 갑자기 낯선 단어들로 인해 얼어붙었다. 집에 갈 시간, 보이지 않던 첫째가 친구와 함께 나타났는데 첫째 친구인 여자 아이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 내 귀를 의심케 했다.
“장난쳐서 절교했어요. 그리고 집까지 얘가 계속 저를 미행했어요."
절교와 미행.
경찰 리포트나 사회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이 무거운 단어들이 아홉 살 아이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 해졌다. 부모 입장에서 내 아이가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는 단어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사건의 전말은 다소 황당했다. 첫째가 장난으로 친구에게 '스쿼트 천 개'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터무니없는 장난에 친구는 '절교'라는 방패를 들었고, 미안한 마음에 뒤를 졸졸 따라간 첫째의 행동은 '미행'이라는 칼날 같은 단어로 규정되었다.
잠시 거슬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상황에서 단어의 무게에 압도되어 아이들을 다그치기보다, 단어의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나는 먼저 여자아이에게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일러주었다.
“얘야, 절교나 미행이라는 말은 아주 무겁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다음부터는 그런 단어를 쓸 때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사용하는 게 어떨까?”
아이에게 언어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어의 위력을 나지막이 전했다.
이어지는 분위기 반전은 유머였다. 나는 첫째를 바라보며 짐짓 허풍 섞인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스쿼트 천 개를 여자아이가 어떻게 하니? 그건 불가능해!" 그리고 여자아이에게는 살짝 윙크를 보냈다. "그래도 스쿼트 천 개 시켰다고 절교는 너무 심했다, 그렇지?"
나의 너털웃음에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범죄'처럼 취급받던 상황이 '철없는 장난'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방금까지 절교를 선언하며 단호한 표정을 짓던 여자아이도 내 웃음에 전염된 듯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아이들의 세계는 참으로 묘해서, '절교'라는 단어의 유효기간은 어른의 웃음 한 번보다 짧았다. 긴장은 눈 녹듯 사라졌고, 마침 다른 친구 한 명이 보이지 않자 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디 갔지?" 하며 함께 친구를 찾으러 달려갔다.
헤어질 무렵, 여자아이는 아까의 화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첫째에게 환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지금 간식 사줄게, 같이 가게 가자!"
그 한마디는 '절교하자'던 선언을 취소한다는 화해의 악수였다. 첫째 역시 "고마워, 하지만 지금 집에 가야 해"라며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과하고 싶어 뒤를 쫓아갔던 첫째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첫째야, 친구가 화났을 때는 바로 뒤따라가기보다 조금 기다려주는 게 좋아. 친구도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거든. 나중에 친구가 다시 다가오면 그때 사과해도 늦지 않아."
아이들은 때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단어를 빌려와 자신의 상처를 과시하곤 한다. 그 서툰 표현력을 꾸짖기보다, 그 단어가 가진 진짜 온도를 알려주는 것, 그리고 때로는 무거운 갈등을 가벼운 웃음으로 승화시켜 주는 것. 그것이 놀이터라는 작은 사회에서 아이들이 부딪히며 성장할 때 부모가 곁에서 지켜줘야 할 '중심'임을 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