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 밤의 산책

노랑코스모스

by 버디나라 나홍석

낮 기온이 34도에 습도까지 높아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두었던 토요일. 여느 때 같으면 이미 자고 있었을 시간인 밤 11시 55분이 핸드폰 액정 위를 지나고 있다. 평소라면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11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드는데,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는 생각에 이것저것 하며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거의 해보지 않던 '산책'을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바탕화면 속 서초동 기온은 29도, 습도는 50%.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마음에 슬리퍼를 신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막상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갈등이 생긴다. 이 동네에서 산책이라면 예술의 전당(이후 예당) 정도에는 가야 하지 않을까? 우면산 자락에 나무와 정원도 있고.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는 곳. 하지만 가족과 함께 라면 모를까 혼자 가기에는 어쩐지 망설여졌다. 게다가 이 시간에 예당이 열려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동네 한 바퀴나 돌아보고 오자는 생각으로 일단 나가본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도 벌써 4년이니 구석구석 다 아는데 뭐 새로울 게 있겠냐는 마음이 들면서도.


예당 쪽으로 크게 오른쪽으로 돌아 걷는다. 골목 끝 가로등을 지나 우측 모퉁이를 돌고 나지막한 오르막길로 접어드니,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차를 몰고 지나치느라 앞만 보았고, 걸어도 주간에 사람들만 스쳐 보았지 이렇게 인도를 따라 가로수 잎 아래로 걷는 밤길은 거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 4년 동안 이 길을 걸어본 시간이 30분도 되지 않을 거다.

같은 곳을 가더라도 지나가는 길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고 들리는 것이 다르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시간이 다르면 또 느끼는 것이 다르다. 계절이 바뀌면 또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자세히 보니 가로수 옆에는 작은 화단들이 있었다. 그저 풀들이 있는 줄만 알았는데, 누군가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듯한 화단이었다. 골프장에서 늘 피해야 했던 화단을 이제는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는 나. 평소 잘 찍지 않던 꽃 사진도 몇 장 남기고, 핸드폰으로 검색도 해본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강렬한 노란빛의 꽃이었다. 잎 모양이 코스모스 같아 검색해 보니 ‘노랑코스모스’. 그냥 사진으로 담기 아쉬워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을 모션포토로 저장했다. 여름 밤바람 속에 흔들리는 노랑코스모스.

한참을 보다가 다시 집 쪽으로 걷는다.

몇 걸음 걷다 되돌아 서서 다시 그 꽃을 본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아직은 이른 가을을 그려본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이 조금씩 젖어 갔네. 누군가 볼까 잠시 멈춰 섰네. 김동률《산책》中 )

https://youtu.be/kZGQttsbFqk?si=gzDUGKimP0ue-6R2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