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서울에서 알바하기 - 역할대행(1)
역할대행 알바는 에피소드가 많아서 두 편으로 소개할까 한다. 처음에는 주말 시간 자취방에 혼자 있기가 무료해서 하객 알바나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서울은 인구가 많고 결혼식이 많으니 하객알바에 대한 수요가 많을 거라 생각했고 알바하면서 주말 점심은 뷔페에서 해결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역할 대행 알바 사이트를 찾아 등록하고 하객 알바 요청을 남겼다. 업체에 신상 등록을 하면 업체에서 의뢰받은 의뢰인의 사연에 따라 적당한 알바생을 연결시켜주는 방식이었다. 정작 기대했던 하객알바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역할 대행 알바는 크게 보면 전화통화를 하는 것과 직접 현장에서 대면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화통화를 하면 3만원을 지급받았고 현장에서 대면으로 만나게 되면 8만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받는 금액의 서너배는 업체에서 가져갔다. 몸으로 뛰는 건 내가 뛰고 챙기는 건 업체에서 대부분 챙겨가는 시스템이다.
몸을 힘들게 사용하는 노동도 아니고 시간도 많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성비만 따지만 역할대행 알바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빈도가 많지 않아서 한달에 두세번 정도였고 대면하러 나가는 경우는 더 드물었다.
역할 대행을 요청하는 사연은 다양했는데 내가 특정한 배역을 맡는다는 입장에서는 마치 연기자가 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나름 재미도 있어서 이 일이 자주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화로 알바를 요청하는 의뢰인들은 간단한 요청을 했다. 단순히 전화 한통에 3만원이면 꿀알바다. 그래도 한 통의 전화를 위해 사연을 듣고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삼십분은 투자를 해야 했다.
어떤 여자분은 회사에 출근이 늦어졌는지 아버지 역할로 회사 직장 상사에게 대신 전화를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내용은 딸이 아파서 아침에 병원에 가야되니 오늘은 출근이 좀 힘들다고 아버지가 직장 상사에게 전화하는 내용이었다. 졸지에 얼굴도 모르는 아가씨의 아버지가 됐다. 나중 우리 딸이 직장 다니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겠구나 싶었다. 천연덕스럽게 누구의 아버지라고 얘기하고 직장 상사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얘기하니 그 상사는 아버님이 직접 전화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전화통화는 1분 30초 정도. 시간 대비 페이가 역대 최고다.
어떤 남자분은 여자친구가 아버지와 통화하기를 원하는데 아버지 역할을 해 달라고 했다. 인자한 아버지와 살고 있다는 자랑을 하고 싶어했는데 실제로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렇지 못한 듯했다. 역시 얼굴도 모르는 총각의 아버지가 됐다. 자연스럽게 아들의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다음에 얼굴 한 번 보자고 인사를 남겼다. 여자친구가 너무 좋아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통화를 잘 하는지 내 스스로 내가 원래 연기에 재능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50이 넘은 나이에 적성을 찾은 건 아닌지. 역할대행 알바를 하면서 엑스트라 역할도 해보고 싶어 엑스트라 알바도 신청을 했는데 처음부터 회비를 내라고 해서 그만뒀다.
전화로 알바를 몇 번 하다가 처음으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요청이 들어왔다. 감격스럽게도 남자 친구 역할이었다. 여자분이 40대 중후반인데 친동생에게 언니가 사귀는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상황이었다.동생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약속을 잡았는데 진짜 남자친구와 사이가 나빠져서 급하게 대타를 구한 셈이다.
의뢰인과 통화를 한 후 약속 장소로 나갔다. 가락 수산시장의 한 횟집에서 만났는데 의뢰인과 친동생 그리고 의뢰인의 친한 동생까지 세 명이서 현장으로 왔다. 서울 올라와서 서울 여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의뢰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궁금하고 설렜다. 마치 소개팅을 하는 기분으로 나갔는데 세 명의 여자분이 한꺼번에 들어오니 약간은 당황했다. 먼저 의뢰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오빠, 나 잠깐만 봐" 하고 말을 걸더니 살짝 불러냈다. 횟집 바깥에서 자초지종 설명을 하고 오늘 잘 부탁드린다는 당부도 했다. 의뢰인은 내가 생각했던 서울 여자와는 좀 달라서 덩치가 크고 이쁘진 않았다. 그런데 함께 나온 친한 여동생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동안 만났던 얘기며 지금 내가 하는 일 등등 의뢰인에게 미리 들었던대로 그럴 듯하게 얘기했다. 동생들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형부"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횟집에서 소주 한잔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니 진짜 남자친구가 된 것처럼 분위기가 좋았다. 의뢰인은 당진에서 모텔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오니 9시쯤 약속을 잡았고 새벽 1시쯤 헤어졌다. 오랫만에 여자분들과 분위기 좋게 술도 한 잔하고 알바비도 벌고 이런 꿀알바가 없구나 싶었다. 물론 마음 한켠에는 이런 거짓말을 해도 되나 하는 미안함이 있었지만 동생이 혹시 나중 알더라도 이 정도는 애교로 봐주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두 번째 오프라인 만남은 아빠 역할이었는데 첫 번째보다는 다소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