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서울에서 알바하기 - 역할대행(2)
역할대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나름 준비가 필요하다. 전화는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목소리로 대강 그럴듯하게 흉내내면 되지만 대면의 경우는 실제처럼 연기를 해야 한다. 미리 만나서 시나리오도 짜야 하고 호칭을 부르는데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 딸과 아빠가 만나는데 대면대면하고 어색해하면 3자가 볼때는 이상할 것이고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첼 수도 있다.
강남쪽에 아버지 역할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오프라인을 나갔다. 총각의 아빠 역할인데 결혼할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는 거다. 미리 전화통화로 대강의 사정을 듣고 현장에는 한 시간 먼저 만나서 입을 맞췄다.
의뢰인은 30대 초중반이었는데 내가 아빠 역할을 하기는 좀 젊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본인은 적당하다 생각했는지 그런 내색은 없었다. 아직까지 30대의 정신세계 속에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30대의 아버지 역할은 용납하기 힘들었지만 남들이 볼 때는 자연스러워 보인 것이다. 어쩌다 어른이 돼 버린 70년대 초반생의 비애다.
잠깐 70년대 초반생들의 서글픔을 말씀드리면 우리는 386에 속하지 않는다. 80년대 학번에 60년대생이라야 386인데 우리는 70년 초반이라 해당사항이 없다. 그리고 5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베이비붐이 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며 매년 100만명 안팎의 출생수를 보이면서 우리는 어느 자리를 가던 막내였고 바로 위로는 빽빽하게 선배들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군대를 갔을 때 무려 20개월 넘게 고참의 단화를 닦아줄 정도로 내 위로 선임이 많았다. 내 밑으로는 띄엄띄엄 후배들이 들어와서 전형적인 재수없는 군번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 세대의 서러움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초점이 아니니 넘어가겠다.
나는 의뢰인에게 왜 아버지가 계신데 연락하지 않고 대행을 찾았냐고 물어보니 아버지 어머니가 최근에 이혼했고 여자친구 집이 상당히 수준 높은 집안인데 이혼한 집은 용납을 못한단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아버지한테 인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진짜 아버지한테 연락을 못하고 대행을 요청했단다. 나이도 있으신데 왜 이혼을? 이라고 물으니 아버지가 바람 피워서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인테리어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버셨고 어머니는 큰 고기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인테리어 업체 사장이 현직인 아버지 역할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며느리 될 처녀는 귀여운 외모에 단아해 보였는데 아이가 하나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이혼한지는 꽤 됐고 나의 아들이 최근에 계속 결혼하자 해서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아버님을 뵈러 나온 것이었다. 나의 아들보다 두세살 나이가 많았고 집안이 부유해서 애견샾을 크게 하고 있다고 나에게 샾 명함을 주었다.
일단 결혼식은 따로 하지 않고 아파트에 들어가서 혼인 신고를 할 예정인데 아파트를 아버지가 사주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들 아파트를 사 주는거다. 속으로 이 정도 되니깐 바람도 피우는구나 싶었다. 서울에서 아파트를 한 채 사 줄 정도면 상당한 재력인데 현실의 나와 역할 대행 속 나 사이의 현타가 왔다.
역할대행을 하다보면 아슬아슬하게 윤리의식의 줄타기를 할 때가 있다. 앞서 말한 남자친구 역할처럼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처럼 결혼할 마음까지 먹은 아가씨를 속이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개인 사정이야 다 있지만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한 시간 정도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쳤다. 강남의 고급 중국집이라 일인당 식비만 해도 상당한데 나의 아들은 나에게 고맙다고 차비까지 챙겨줬다. 이후에는 업체를 통하지 않고 따로 연락드릴테니 여자친구한테 잘 해달라는 부탁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