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를 대표한다는 예술 작품들이 많지만 그 리스트의 정점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가난하고 박해받던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뉴욕항에 들어섰을 때 이들을 처음 반겼던 상징적 존재가 자유의 여신상이었고, 이 장면을 <대부>나 <타이타닉>을 위시한 수많은 명화들이 감동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아는 인류 문명이 파멸한다는 이야기를 충격적으로 표현한 1968 년 SF 영화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쓰러진 채 모래사장에 반쯤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우주선을 타고 다른 혹성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인류가 파멸한 미래의 지구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인류 문명의 상징으로까지 도약한 자유의 여신상은 원래 미국 독립 100 주년을 기념할 목적으로 1876 년 프랑스인들이 돈을 모아, 프랑스 조각가들이 만들어서, 뉴욕시에 세운 거대한 동상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여신은 갑자기 미국에 나타난 신이 아닙니다. 고대 로마에서 해방된 노예들의 신이었던 리버타스 (Libertas)에서 유래하거든요. 고대 로마에서는 주인이 노예를 풀어주고자 할 때 노예의 머리를 삭발하고 필레우스 (pileus)라는 모자를 씌우고 로마 정무관 (magistratus)에게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주인이 왜 노예를 풀어주려 하는지 설명을 하면 정무관은 막대기를 노예의 머리에 대고 준비된 의식을 행한 후 노예의 해방을 공식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 바탕을 두어서 리버타스 여신은 해방된 노예들이 썼던 필레우스 모자를 쓰고, 긴 막대기를 손에 쥐고, 긴 가운을 입은 여신으로 묘사됐습니다.
여신을 특히 사랑하는 유럽인들의 후예들이 건국한 미국에서는 그 초창기부터 몇 후보가 나라를 상징하는 여신 위치를 두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일단 컬럼비아 (Columbia) 여신이 선두주자였습니다. 17세기말 메사츄세스 식민지의 대법원장이던 사무엘 세월 (Samuel Sewall)이 미국을 컬럼비아로 부르자고 주창하면서 생겨난 이 용어는 독립전쟁 당시 미국인들에게 더욱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당시의 미술가들이 컬럼비아 여신을 표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할리우드 영화 애호가들은 컬럼비아 영화사의 작품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이 여신의 모습이 낯익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 리버티 여신이 뜨기 시작했는데, 이는 프랑스의 영향이 컸습니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미국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독립전쟁에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 증원군을 바다에서 막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소위 미국의 혈맹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몰락하고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초반에 여러 번에 걸쳐 왕정이 복구되고 또 혁명을 통한 공화 정부가 들어서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프랑스 공화정 세력의 상징이 된 것이 리버티 여신입니다. 1830 년 유진 델라크로이 (Eugene Delacroix)의 유화 <대중을 이끄는 리버티>가 이를 표현한 대표적인 미술 작품이지요 (아래 그림 참조).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자유의 여신은 주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노예들의 신에서 더 발전해서 전제 군주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공화국민들의 신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영국 전제 군주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을 세운 미국인들이 이에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중반부터는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금화에 자유의 여신이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자유의 여신이 더욱 주목을 받은 계기는 워싱턴 DC의 캐피톨 힐 (Capitol Hill) 언덕에 위치한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 증축과 관련이 있습니다. 19세기 초반 아담한 규모로 지어졌던 의사당 건물은 몇십 년 후 서부 개척을 통해 미국이 팽창하면서 증축의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 증축 계획의 일환으로 건물을 넓히고, 그 위에 멋진 원형 돔을 얹고, 또 그 꼭대기에 미국을 상징하는 여신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1860 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조금 전 일인데요, 이 계획에 깊게 관여했던 인물이 훗날 남부 분리주의자들의 대통령이 된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입니다. 남북 전쟁 이전에 상원 의원의원으로서 노예 제도의 수호를 강력히 주장했던 데이비스였으니 당연히 로마 시대 노예 해방의 상징이었던 자유의 여신 표현에 몇 가지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로마의 리버타스와는 달리 막대기 대신에 칼을 들고, 해방된 노예들이 쓰던 필레우스 모자의 모양이 바뀐 동상인데, 그 이름도 로마의 여신 리버타스 (Libertas)가 아닌 프리덤 동상 (Statue of Freedom)으로 명명됐습니다. 그런데 의사당 돔을 짓기 직전에 남북전쟁이 터졌고 제퍼슨 데이비스는 워싱턴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노예 해방론자였던 미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전쟁 중 의사당 증축을 마쳤습니다. 지금의 미국 의사당 꼭대기에는 그 복제품이 서 있고, 원래의 자유의 여신상은 의사당 내부에 진열돼 있습니다 (아래 그림 참조).
이렇게 남북전쟁을 거치며 자유의 여신은 다른 이들이 토를 달 수 없는 미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 1876 년 미국 독립 백주년이 되는 해가 왔습니다. 미국의 독립에 크게 공헌했고 또 당시까지 미국의 우방이었던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어 미국에 선물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민간인들에게 걷은 기부금을 이용해서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 (Bartholdi)가 46미터 높이의 거대한 동상을 디자인했습니다. 그 표면은 구리로 덮여 있지만 그 구조를 떠 받치고 있는 것은 내부의 철제 골격입니다. 그 내부 구조물은 에펠탑 설계로 유명했던 구스타프 에펠 (Gustav Eiffel)이 직접 설계했습니다. 바르톨디는 이 자유의 여신상을 디자인하며 로마의 리버타스, 유진 델라크로이의 그림, 그리고 미국 국회의사당 위의 자유의 여신을 열심히 참조했습니다. 일단 델라크로이의 그림에 나오는 자유의 여신은 폭동과 사회 불안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미국에 주는 선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또 로마의 리버타스 여신의 전통적인 모습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막대기를 든 여신의 모습 대신 등불로 세상을 비추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하나 변형된 것이 모자입니다. 로마 전통을 따른다면 앞으로 구부러진 필레우스 모자를 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뾰족한 모양의 왕관으로 바꾸었습니다. 로마의 리버타스에서 많이 바뀐 모습이지만 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 뉴욕항에 서 있는 이 동상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자유의 여신상일 것입니다.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진 후 미국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큰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무슨 비결로 이러한 눈부신 발전이 가능했을까요? 작년 노벨 경제학은 <왜 나라는 실패하는가>라는 저서로 유명한 MIT의 다렌 아세모글루 (Daron Acemoglu)와 시카고 대학의 제임스 로빈슨 (James Robinson) 교수에게 수여됐는데요,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국민 모두에게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국가가 성공한다고 합니다. 전제 정권이 멋대로 그 구성원들을 경제적으로 탄압하거나, 사회 계급이 고착되어 국민의 다수가 동등한 경제 활동을 못하는 국가들이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역으로 박해받는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이들이 억압과 차별 없이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그 잠재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 미국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아이디어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여신상 위에 올해는 먹구름이 낀 느낌이네요. 이민자들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고, 평화적 반전 시위를 한 사람들은 잡혀가고, 권력자들에 비판적인 학자, 법조인, 그리고 대학교들이 크게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잠시 지나가는 먹구름이겠지요. 수백 년간 경험과 지혜를 통해 형성된 자유의 여신으로 대변되는 공동번영의 철학이 불과 몇 년 못 가는 권력자들 때문에 무너질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도 그 자유의 여신상을 보겠다는 수많은 관광객이 뉴욕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