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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낙원을 꿈꾸며 조성한 운터마이어 정원

by 류형돈

지상낙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영어에서 지상낙원을 의미하는 "파라다이스"는 페르시아어로 담으로 둘러쌓인 정원을 의미합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이 정원을 가꾸는 데에 특히 뛰어났으니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단어를 아름다운 정원 묘사에 차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구약성경을 번역하면서 에덴 동산을 파라다이스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 성경이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통해 전세계로 퍼지며 옛 페르시아, 인도, 북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무어족들이 에덴 동산을 모델로 곳곳에 파라다이스 정원을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파라다이스 정원이 뉴욕에도 하나 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 법조계에서 크게 명성을 날렸던 변호사 사무엘 운터마이어 (Samuel Untermyer)가 뉴욕시 북쪽 용커스 (Jonkers)에 조성한 운터마이어 정원 (Untermyer Garden)입니다.


운터마이어는 미국이 고도 성장을 통해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뉴욕에서 이름을 떨치던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기업 및 금융 관련 법무로 명성이 대단했는데 하는데, 미국 변호사 역사상 처음으로 건당 수임료 1백만 불을 돌파한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고 하네요. 돈도 많이 벌었고, 나중에는 유명 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조사하면서 사회적 명성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운터마이어는 그 어머니의 영향으로 정원을 가꾸는 데에도 대단한 취미가 있던 사람입니다. 그냥 화초를 키우는 정도가 아니라 더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보겠다고 서로 다른 종자들을 직접 교배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수준의 원예 실력을 자랑했다고 하네요. 그런 그가 1899 년 13개의 그린하우스를 포함한 정원이 있는 50 핵타르의 땅을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던 사무엘 틸덴 (Samuel Tilden)으로부터 매입했습니다. 뉴욕시 북쪽에 위치한 용커스 (Jonkers)라는 동네의 허드슨 강변 절벽 위에 위치한 땅입니다. 이곳은 언덕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허드슨강과, 그 반대편 뉴저지에 보이는 팔리세이드스 (Palisades)라고 부르는 멋진 해안 절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운터마이어가 이 부지에 본격적으로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할 때쯤 그 북쪽으로 10여 마일에 위치한 곳에는 미국 최대 부호 존 디 록펠러 (John D. Rockefeller)가 카이키트 (Kykuit) 저택과 정원을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데 있어서는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했던 운터마이어는 이를 보고 경쟁심리가 작동했던 듯 합니다. 그리하여 록펠러의 정원을 능가하는 최고로 아름다운 정원을 짓겠다며 록펠러 저택을 설계한 윌리엄 보즈워스 (William Bosworth)를 고용했습니다. 최고로 아름다운 정원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보즈워스는 지상낙원을 만들겠다며 페르시아 양식의 정원을 제안했습니다.


운터마이어 정원은 파라다이스 정원의 기본 디자인을 따랐습니다. 일단 정원 주위를 고풍스러운 벽으로 둘렀습니다. 그 입구 안쪽에는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심어 커다란 그늘을 형성하도록 했고, 그 바로 밑에 조그마한 분수를 설치했습니다. 물이 높이 솟구쳐 오르는 현대식 분수가 아니라 마치 지하수 샘물 같이 졸졸 소리를 내며 물이 나오는 아담한 분수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물이 일직선의 수로를 따라 흘러갑니다 (아래 그림 오른쪽). 남부 스페인을 여행한 분들에게는 눈에 익은 분수와 수로 디자인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에도 있고, 코르도바의 정원에도 있는 수로 스타일이지요. 이 수로가 파라다이스를 흐르는 강을 상징합니다.

(왼쪽)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의 안뜰에 있는 수로. (오른쪽) 운테마이어 정원의 수로. 멀리 보이는 원형 석조물은 하늘 신전입니다.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니 구약성경의 내용을 유대교 및 기독교와 공유를 하지요. 창세기 2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에덴의 동쪽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자라는 정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발원한 강이 정원을 적시고는 네개로 갈라졌다고 하였는데 그 강의 이름들은 비손 (Phison), 기혼 (Gihon), 티그리스 (Tigris), 유프라테스 (Euphrates)입니다. 이슬람의 코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만 파라다이스에서 흘러 나오는 네개 강의 이름이 유프라테스, 나일, 사이한, 자이한 강이라 하니 이름만 살짝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슬람이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세력을 팽창하며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때 이슬람 건축가들이 고대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 정원에 매료됐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이 기원전 6세기 아케메니드 (Achaemenid)제국 시절부터 만들어 오던 챠하르바그 (Chaharbagh)라는 정원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그 정원의 중심에는 십자 형태로 흐르는 물길이 있습니다. 그 수로의 구조 때문에 정원이 네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맛있는 열매를 맺는 식물들을 심어 놓습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이러한 페르시아식 정원을 계승 발전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네개의 물길이 코란에 묘사되는 낙원에 흐르는 네개의 강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그 수로에 마치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오아시스 느낌이 나는 분수도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이 페르시아 동쪽으로 계속 팽창하며 인도에 무굴 제국이 세워졌습니다. 무굴 제국의 다섯번째 황제 샤 자한 (Shah Jahan)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타지마할 (Taj Majal)이라는 어마어마한 무덤을 지었는데, 그 앞의 정원이 전형적인 페르시아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죽은 아내가 편히 쉴 수 있는 지상낙원을 조성하는데 페르시아식 파라다이스 정원만한 것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서쪽으로는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을 따라 스페인 남부까지 페르시아 양식의 정원이 퍼졌습니다. 운터마이어 정원도 이 페르시아 양식에 충실합니다.

페르시아 양식에 따라 십자형 수로가 배치된 정원. (좌) 운터마이어 정원. (우) 인도의 타지마할.

운터마이어 정원은 페르시아 및 이슬람 양식에 바탕을 두었지만 이를 설계한 보즈워스는 그리스 로마 건축에도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흔적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정원을 들어가는그 입구의 벽 꼭대기에는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여신 부조가 조각돼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를 지나 정원의 서쪽에는 고린도 양식의 기둥들이 둥그렇게 배치돼 있는 하늘 신전 (Temple of the Sky)이라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닥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얼굴 모자이크가 장식하고 있고요. 정원의 북쪽 끝에는 그리스 아오이나 양식의 대리석 기둥들이 서 있습니다. 그 꼭대기에 스핑크스 조각이 앉아 있는데, 이집트의 사자 같은 스핑크스가 아니고 고양이를 더 닮은 그리스식 스핑크스입니다. 20세기 초 최고 명성의 클래식 조각가였던 폴 맨십 (Paul Manship)이 만든 작품입니다. 이 기둥 주위의 공간은 그리스 양식의 자그마한 원형극장의 일부입니다. 그 극장 주위로 더욱 화려한 정원이 가꾸어져 있습니다. 운터마이어는 생전에 매주 화요일 이 정원을 일반에 공개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가족이 지인들을 가끔씩 초대해서 음악과 연극 공연을 감상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감상하는 음악 공연 분위기는 실로 환상적이었을 듯 합니다.

운터마이어 정원 원형극장 앞의 그리스 양식 기둥과 스핑크스

그 원형 극장 왼쪽으로는 허드슨 강가를 향해 내려가는 일직선의 계단이 있습니다. 그 계단의 양쪽에는 키가 큰 나무들을 심어 보는 이의 시선을 강으로 집중시킵니다. 이 부분은 보즈워스가 이탈리아의 코모 호수 (Lake Como)가의 저택 빌라 드에스테 (Villa D'Este)의 디자인을 차용해서 조성했다고 하는군요. 빌라 드에스테가 평화로운 코모 호수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면, 이곳은 보는 이의 시선을 허드슨 강과 그 이면의 뉴저지 팔리세이드스 절벽으로 집중시킵니다.

운터마이어 정원에서 보이는 허드슨강

이 계단의 맨 아래에는 허드슨 강을 조망하는 전망대 (Overlook)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전망대에 두개의 고대 로마 기둥들이 서 있어서 더욱 운치를 더하는데, 19세기 후반 미국 최고의 건축가중 하나였던 스텐포드 화이트 (Standford White)가 구매해 미국으로 가져온 것을 운터마이어가 다시 산 후 여기에 배치를 했다고 하는군요. 운터마이어 정원측 주장에 의하면 미국에서 가장 큰 로마 기둥이라고 합니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 로마 양식을 사랑한 운터마이어와 그의 건축가 보즈워스가 상당히 공을 들인 것은 틀림 없는 듯 합니다.


이 운터마이어 정원이 조성된 것이 불과 백여 년밖에 안 됐지만 여느 고대 유적처럼 그 사이에 폐허로 변했다가 다시 복구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운터마이어가 1940 년 세상을 떠나면서 이 정원을 뉴욕주 또는 뉴욕시에 기증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정원을 관리할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뉴욕시와 주정부가 거부하면서 용커스시로 소유권이 넘어갔습니다. 예산이 없어 오랜 기간 관리를 못했으니 이곳은 비행 청소년들과 마약 사범들의 놀이터로 변했다고 하네요. 이 땅에 서 있던 운터마이어의 저택도 철거됐습니다. 그러다가 2010 년 이후에 운터마이어 보호재단이 설립되며 이 정원 복구를 위한 모금 운동이 전개됐고, 이 정원의 허드슨강가에서 결혼 사진을 찍었다는 마이클 스패노 (Michale Spano)라는 인물이 용커스 시장에 당선되면서 복구 작업에 추진력이 더해졌습니다. 쓰러진 나무를 치우고, 석조 구조물들에 있던 낙서들을 지우고, 바닥의 모자이크 그림들을 복원하고, 분수대를 다시 작동시키고, 원예 전문가를 고용해서 다시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몇해 전 관람객들을 위한 시설들을 완비하고 다시 개장했습니다. 이를 복구한 단체의 구호가 재미있습니다.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잊혀진 정원"이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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