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에서 북쪽으로 40 킬로쯤 떨어진 곳에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부자가 살던 집이 있습니다. 포칸티고 힐스 (Pocantico Hills)라는 동네의 카이키트 (Kykuit)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 집은 스탠더드 오일 (Standard Oil) 창업주로서 한때 미국 석유산업을 독점하고 이 나라 총 GDP의 3%에 달하는 막대한 부를 쌓았던 존 디 록펠러 (John D. Rockefeller)가 이 지은 것입니다. 카이키트는 네덜란드어로 "전망이 내려다 보이는 곳"을 뜻하는데, 록펠러는 그 언덕 위에서 펼쳐지는 절경에 끌려서 여기를 집터로 정했을듯합니다. 이 저택은 후에 그의 아들 존 디 록펠러 주니어 (John D. Rockefeller Jr)가 물려받았고, 미국 부통령을 역임했던 그의 손자 넬슨 록펠러 (Nelson Rockefeller)가 1979 년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록펠러가 그저 돈 많은 여러 재벌 중 하나였다면 이 동네의 위상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하지만 록펠러 가문은 자신들의 천문학적 부를 이용해 뉴욕을 세계 미술계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기에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이들의 본가인 카이키트 저택을 찾습니다.
지금은 뉴욕의 미술 문화유산으로 유명한 집안이지만 존 디 록펠러는 미술에 조예가 깊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업 경쟁자를 제압하고 돈을 버는 수완만 뛰어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1900 년대 초 미국은 그가 긁어모은 돈과 독점을 이용한 불공정 사업 행태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셌습니다. 1901 년부터 8 년간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던 테오도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가 이러한 민심을 따라 스탠더드 오일을 신탁방지법 위반으로 기소했고, 결국 법원은 1911 년 이 재벌 그룹 해체를 명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훼손된 가문의 평판을 바꾸어 보자며 존 디 록펠러의 아들 록펠러 주니어가 그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크면서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있던 주니어는 대중들을 위한 공공미술에 돈을 쓰면 자신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 주니어의 말을 듣기 시작하면서 록펠러 가문은 20세기 뉴욕 미술계의 가장 큰 후원자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소문난 구두쇄였던 존 디 록펠러 1세는 여기에 애초 나무로 된 평범한 집을 지었습니다. 그 건물을 보고 뉴욕의 건축 전문가들이 "클리블랜드 출신 졸부들이 역시 세련미가 떨어진다"라며 혹평을 했다고 합니다. 얼마 안 있어서 화재로 그 집이 소실되고 1913 년 새 집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 왔는데, 이때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록펠러 주니어가 그 아버지의 위임을 받아 새 집을 지었습니다. 그는 건축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그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아늑한 집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디자인과 인티리어에 일가견 있는 손님들이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집을 지어 주세요."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는 로마 판테온을 모델로 해 메사츄세스 공과대학 (M.I.T.) 중앙 도서관을 설계한 경력이 있던 윌리엄 보스워드 (William Bosworth)입니다. 보스워드는 록펠러의 뜻을 따라 아름다우면서도 당 시대 다른 거부들의 맨션보다는 규모가 작고 조금 덜 사치스러워 보이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로마 양식에 심취한 건축가였는데 그의 취향이 건물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카이키트 건물 앞면 꼭대기에는 그리스 양식에서 흔히 보이는 세모꼴 페디먼트가 있고 그 안에 로마 여신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록펠러 주니어가 이 저택을 지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거기에 힌트를 제공하는 조각상이 이 저택 입구 앞에 있습니다. 오세아누스 분수대라고 불리는 대리석 작품인데 중앙에 바다의 신 오세아누스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막대기를 든 채 그의 발 및에 앉아 있는 세 인물을 통치합니다. 그 셋은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그리고 갠지스강을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이 조각은 세계에서 제일 귀하다는 이탈리아 카라라 대리석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짝퉁 조각상입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정원에 있는 오세아누스 분수대 조각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거든요. 이와 같이 짝퉁 조각을 자신들의 저택 앞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설치한 것으로 보건대 1913년 록펠러 가문은 초보 미술 애호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조각상 중 특히 메디치 가문의 석상을 흉내 내기로 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거대한 가문의 부를 이용해 피렌체를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으로 발전시켰던 메디치 가문의 석상을 배치하면서 자신들을 역사에 길이 남는 미국의 메디치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록펠러 가문은 그 이후 20세기 뉴욕의 미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요. 1930년대에 뉴욕시에 록펠러 센터와 모마 (Museum of Modern Art)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대 미술품들을 수집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했고요. 이 가문의 자선사업에 힘입어 뉴욕은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미술계의 중심지로 발돋움했어요.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예술품들이 수없이 많습니다만 왜 록펠러는 오세아누스 조각상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까요? 그 해답은 오세아누스 조각상에서 카이키트 저택 정문을 향하면 볼 수 있습니다. 정문의 열린 문을 통하면 그 집의 거실이 나타나고, 그 거실 끝의 통유리를 넘어 이 저택의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고, 그 언덕 아래로 허드슨강의 멋진 모습이 나타납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 유프라테스, 나일, 갠지스 강들의 대척점에 새로 떠오르는 미국 문명의 대표적인 강 허드슨이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자 한 것이지요.
이곳이 소장하는 미술품들은 1913 년 이후 3대에 걸쳐 수집한 것들입니다. 집안의 거실에는 중국 유물이 많아 특이한데요, 특히 커다란 창가 앞에 서 있는 당나라의 불교 보살의 석상이 눈길을 끕니다. 거실에 결려 있는 커다란 피카소의 그림과 미국 최고의 초상화가로 통하는 존 싱어 사전트 (John Singer Seargent)가 그린 이 집안의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도 인상적입니다.
거실의 통유리 넘어로 보이는 정원에는 허드슨강이 보이는 위치에 나무와 조각들을 조화롭게 배치해 놓았습니다. 록펠러 가문은 일찌기 이 정원 너머 보이는 땅을 폭넓게 매입했기에 이곳에서 허드슨강 건너편까지 전원적 풍경이 멋지게 펼쳐집니다. 이 정원의 조각 상당수는 현대 조각을 사랑했던 넬슨 록펠러가 1962년 이후 수집한 것들입니다. 모마 (MOMA)를 창립한 그의 어머니 애비 앨드리치 록펠러 (Abby Aldrich Rockefeller) 밑에서 자라며 대단한 미술적 소양을 가지게 된 인물이지요. 셋째 아들이었지만 그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나중에는 큰 형님들을 제치고 이 집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1959 년부터 1973 년까지 뉴욕 주지사를 역임하며 사회적 명성까지 쌓았습니다. 넬슨 록펠러는 1964 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까지 했는데 첫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비서와 재혼을 한 것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혼한 아내 해피 록펠러 (Happy Rockefeller)의 본명은 마가레타 (Margaretta)입니다. 항상 쾌활한 그의 성격 때문에 어릴 적부터 해피라는 애명으로 불렸다고 하네요. 이 집을 방문한 수많은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해피 록펠러의 평판이 좋았습니다. 성격이 아주 따뜻했으며 평상복 차림의 소탈한 모습으로 손님들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는 어느 유명 작가의 회고도 있습니다. "아늑한 집의 편안함"을 손님들이 느낄 수 있게 하고 싶다던 록펠러 주니어의 희망이 그대로 실현된 셈입니다. 넬슨은 해피와 카이키트에 살면서 넘치는 에너지를 정원 가꾸는 데에 쏟았습니다. 그 당시 아방가르드 조각가로 이름을 떨치던 핸리 무어, 콘스탄틴 브랑쿠시, 알베르토 지아코메티 등의 조각들을 열심히 수집하면서 그 조각들을 정원의 풍경에 맞게 배치하는 데에도 크게 신경을 쓴 것이지요. 그래서 넬슨 록펠러는 조각을 조경의 일환으로 배치한다는 개념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이후 넬슨 록펠러는 1974 년 제랄드 포드 (Gerald Ford)의 정부에서 3 년간 부통령으로 재임하게 됐습니다. 그는 1977 년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했고, 2 년 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는데, 죽는 순간까지 언론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가 타계했다는 뉴스가 터졌을 때 록펠러 집안 대변인은 그가 맨해튼 사무실에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를 했는데요, 그 며칠 후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파해친 결과 사무실이 아닌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사망했다고 밝혀졌거든요. 그리고 그의 사망을 신고한 사람이 메건 마샥 (Megan Marshak)이라는 젊은 여성이라는 이야기가 뒤이어 나왔습니다. 나중에 넬슨 록펠러가 남긴 유언장 내용이 공개됐는데 거기에는 메건 마샥에게 빌려준 거액의 돈을 탕감한다는 내용도 있었으니 둘이 불륜 관계라는 추측이 퍼지게 되었지요. 어느 출판사 에이전트가 이 여성에게 넬슨 록펠러와의 관계에 관한 회고록을 쓰면 백만 불을 선불로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그녀는 2024 년 타계할 때까지 이 건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넬슨은 유언장에 나머지 재산은 자신의 아내 해피에게 준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사후 카이키트 저택을 사회에 환원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해 달라고 적었습니다. 아마 넬슨은 자신의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미리 예측을 못했던 듯합니다. 그 당시 집에는 그의 아내 해피와 중학생 아이들 둘이 아직 살고 있었거든요. 넬슨의 미망인 해피는 아이들을 다 키운 후인 1994 년이 돼서야 카이키트 집을 역사적 유적 보존 재단 (National Trust for Historic Preservation)에 넘기면서 카이키트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고요.
해피 록펠러는 포칸티고 힐스에 또 다른 집을 짓고 이사 나갔습니다. 포칸티고 힐스 땅의 대부분이 록펠러 가문의 소유였고, 넬슨 록펠러의 동생이자 체이스 맨해튼 은행 (Chase Manhattan Bank)의 회장을 역임한 동생 데이비드 록펠러 (David Rockefeller), 그리고 넬슨의 두 형들도 이 지역에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더해 이 동네에는 이 3백 여명 가까이 되는 이 가문의 후손들을 위한 가족 전용 골프장을 비롯해 레크리에이션 시설인 플레이하우스 (Playhouse)가 아직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넬슨 록펠러 사망 당시 이 집에 살던 막내 아들 마크 록펠러 (Mark Rockefeller)는 성인이 된 후 이 집과 동네의 관리와 보존을 책임지는 허드슨 역사 소사이어티 (Historic Hudson Society)의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는군요. 그에게 이곳은 얼마나 특별한 곳일까요?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뛰어 놀던 추억, 이 집을 드나들던 수많은 유명인사 손님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어릴적 돌아가신 아버지와 성격이 밝았던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겠지요. 그러니 그가 카이키트를 보존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것이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카이키트는 일반에 공개 이후 철저히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서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투어가 영어로 진행되니 영어를 못 하는 외국인 관람객은 드문 편이고요. 매표소에서부터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단체 버스를 탑승하도록 되어 있고, 투어 내내 가이드는 무전기를 들고 다니며 인원을 체크합니다. 그 아름다운 정원 풀밭을 관람객이 혼자 걸어 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2 시간의 단체 관람이 끝나니 가이드가 다시 관람객 인원수를 체크한 후 단체 버스에 태워 경내를 나가도록 합니다. 이 까다로운 관람 규칙이 혹시 이 집에 대한 록펠러 가족의 애착을 투영하는게 아닐까요? 비록 넬슨 록펠러의 유언을 따라 집을 사회에 환원했지만 그 유족들은 아직도 외부인들이 헤집고 다녀서는 안 되는 내집이라는 생각을 마음 속에서 떨치지 못하는구나, 그런 추측을 하며 카이키트를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