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사람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왠지 불편해집니다. 망측한 느낌에 시선을 피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힐끗 훔쳐보기도 하며, 이를 쳐다보는 자신의 모습이 들킬새라 어색하게 주위를 살핍니다. 내가 남 앞에서 벌거벗어야 하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불편하고 수치스럽습니다. 그런데 서양 예술가들은 수천 년간 벌거벗은 사람 석상을 만들어 왔습니다. 박물관들마다 잔뜩 전시하는 이러한 누드 군상들을 처음마주하는 관람객들은 눈을 어디 둘 지 몰라 어색해 하지만, 박물관 출입이 잦아지면서는 이들을 그저 돌 보듯이 하며 지나칩니다.
누드 조각을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민족은 고대 그리스인들입니다. 현대인이 주목하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 석상과 신전들은 그리스가 아르카익 (Archaic) 시대에 들어선 기원전 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기원전 600 년경 조각된 남성 누드 석상, 뉴욕 코우로스 (New York Kouros)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테네 귀족 청년의 무덤을 장식하던 석상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갑자기 이러한 석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에 훨씬 앞서서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3천 년부터 거대한 석상과 신전을 만들고 살았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이집트 전시관에는 기원전 2천5백 년 전에 만들어진 남자 석상이 있는데, 그리스의 코우로스 석상과 거의 동일한 포즈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석상이 표현한 근육질의 청년의 팔은 몸통에 바짝 붙어 있고, 주먹은 꼭 쥐고 있으며, 왼쪽발은 내딛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 참조). 두 작품 모두 발달된 상체 근육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본 학자들에 의하면 이 시기 그리스 석상과 이집트 석상의 신체비율도 거의 동일하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조각을 만들기 조금 전인 기원전 8세기 이후 항해술을 발전시켰고, 또 이집트는 지중해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리스 예술가들이 이집트에 가서 석상 만드는 방법을 배워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코우로스 석상은 이집트 석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면도 눈에 뜨입니다. 그리스 코우로스는 머리띠와 목걸이를 빼고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모습을 하고 있거든요. 고대 그리스 전시관에 나열된 다른 석상들을 관람하노라면 그리스 문화의 특이한 패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벌거벗은 모습인 반면 여성들을 묘사한 석상은 드레스를 입고 있거든요. 남자 코우로스와 대비되는 것이 여성 코레 (kore) 석상들인데 대표적으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페플로스 코레가 특히 유명합니다 (윗 그림 오른쪽). 이러한 그 고대 그리스 미술 전통은 기원전 200 년전까지 이어져 여성들은 모두 옷을 입은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왜 고대 그리스인들은 남성들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표현하길 좋아했을까요?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그 지역에 산재했던 여러 개의 도시국가 (폴리스; Polis)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4년에 한 번씩 올림픽 제전에 모여 종교 및 체육 축제를 했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단순한 체육대회가 아니라 거대한 종교 행사였으니, 거기에서 유명해진 사람들은 단순한 체육계 스타 이상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올림픽 제전은 남성들만이 참여하는 행사였는데 선수들은 옷을 입지 않은 채 힘을 겨뤘습니다. 그당시 관객들은 올림픽 관객들은 벌거벗은 최고 셀럽들의 육체미를 보며 강인한 신을 연상했던 듯 합니다. 자연히 그리스 조각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의 남성 신들도 보디빌더와 같은 근육질의 모습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석상들은 그 이후 동서양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그 대표로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도 소개되는 "헬레니즘 문화"가 있지요. 마케도니아 출신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를 정복하고도 성이 안 차서 인도 접경까지 정복 전쟁을 계속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도 그리스인들의 후예들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파키스탄 북서부 지방을 어우르는 "간다라"라는 지역에 계속 남았습니다. 이 지역에 불교가 융성하자 그들은 그리스 신 석상을 조각하듯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동아시아 전역으로 "헬레니즘" 양식의 불상들이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세계적으로 그 근거가 되는 석조 예술품이 많이 존재하는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도 그 예가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인데, 그 부처님의 왼편에 웃통을 벗은 채 무기를 들고 있는 근육질의 남성이 보입니다. 번개를 들고 있는 자, 즉 바즈라파니 (Vajrapani)입니다. 그는 곱슬머리의 서양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는 간다라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부처님의 경호원으로 변모시킨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간다라 양식의 미술이 동아시아에 퍼지면서 우리나라의 사찰에도 "금강역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대표적으로 석굴암 입구 양편에 금강역사 부조가 있는데요,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모습에서 남성의 육체미를 사랑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 참조).
서양에서는 로마가 그리스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수많은 누드 조각상을 배출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멸망 이후 한동안 주춤했던 누드 조각들이 르네상스 이후에 다시 부흥을 했지요. 더욱 사실적인 묘사를 발전시켰던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들이 특히 신경을 쓴 것이 남성의 근육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수많은 거장들이 그래서 시신을 해부하며 근육을 표현하는 기술을 연마했습니다. 지금의 이탈리아에 가면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조각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밀라노 대성당에 서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조각상입니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예수의 제자 출신으로 피부까지 도려내는 형을 당하면서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조각가가 피부가 없고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물을 조각한 것입니다 (아랫 그림 왼쪽 참조). 이는 결코 예외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자랑하는 볼로냐 대학교에는 17세기 지어진 해부학 강의실이 있는데, 그곳에도 피부가 없는, 근육이 그대로 들어나는, 사람의 조각이 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아랫 그림 오른쪽 참조). 아마도 조각가들이 자신들이 열심히 공부한 해부학적 지식을 과시하고 싶었던 듯 합니다.
이탈리아가 이어받은 고대 그리스 전통은 미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방문시 제일 먼져 눈에 띄이는 것이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건물들입니다. 미국 대법원 건물을 예로 들어 볼까요? 미국 대법원은 원래 길 건너에 위치한 의사당 건물의 한편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요, 20세기 초반에야 독립된 건물을 세워 이사하게 됐습니다. 강대국으로 발전한 미국의 대법원을 어떤 양식으로 지었어야 할까요. 법원이라 하면 사람의 목숨까지 결정할 수 있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니 국민들에게 신성에 버금가는 권위를 과시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로마 신전과 같은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습니다. 로마의 신전은 카라라 (Carrara) 지역의 하얀 대리석으로 지었다면 미국 대법원 건물은 비슷한 색상의 버몬트 대리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권위를 더 세우기 위해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한참 오르도록 했고, 입구 앞에는 고린도 양식의 기둥을 나열시켰습니다. 그 기둥들은 세모꼴의 페디먼트를 떠 받치고 있는데, 그 정 중앙에 자유의 여신 (Liberty) 석상이 있습니다. 이 여신은 원래 로마시대 당시 해방된 노예들의 신이었는데, 미국에서 독립전쟁 이후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주 사용했습니다. 길 건너 의사당 꼭대기에도 하나 있고, 뉴욕항에도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한 전통을 따라서 이 여신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됐습니다.
이 자유의 여신 옆으로 여러 인물들이 배치돼 있는데, 그 가장 왼쪽편에 묘사한 사람이 윌리엄 태프트 (William Thaft)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 미국이 방해를 않겠다는 카스라-태프트 밀약에 서명했던 사람으로 태프트를 소개합니다. 태프트는 이 밀약 서명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고, 그 얼마 후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에는 종신 대법원장으로 재직한 특이한 경력도 있습니다. 당연히 미국 각계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이를 이용해서 의회로부터 예산을 확보해 대법원 건물을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대법원 건물이 완공되기 이전인 1930년 세상을 떠났는데, 건축가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법원 건물 페디먼트 왼쪽 끝에 그의 모습을 조각해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조각한 예술가가 윌리엄 태프트를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젊은 남성으로 표현했습니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을 역임한 나라의 지도자를 반라의 모습으로 표현했다니 다른 문화권이라면 용납이 안 되겠지만, 남성 누드를 숭배하던 그리스-로마 문화를 계승한 이곳 사람들에게는 어색할 것이 없는 고풍스러운 돌조각으로만 보이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