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자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입구를 들어서면 그 왼편에 그리스-로마 전시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입구 가까이는 이곳의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 석상들이 진열돼 있고, 여기서 긴 통로를 따라가면 로마 전시관이 나옵니다.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이 모두 이 중앙 통로를 이용해야 하니 여기에 이 박물관에서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로마 석상들이 진열돼 있습니다. 그 통로의 한가운데에 두 손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리는 비너스/아프로디테 석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그 모습이 역설적으로 관능미를 부각하기에 사람들이 이 석상을 더욱 주목합니다. 미술 역사가들은 이 포즈를 가리켜 비너스 푸디카 (Venus Pudica)라고 부르곤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기세를 떨치던 2021 년 이 고대 로마 석상이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매물로 나타났습니다. 서기 1 또는 2세기 전후 제작된 대리석 누드 여신상으로서 1770 년대에 로마 인근에서 발견된 것을 스코틀랜드의 더글라스 해밀턴 공작 (Douglas Hamilton, 8th Duke of Hamilton)이 구매하면서 일명 해밀턴 아프로디테라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해밀턴 공작은 스코틀랜드의 라나크셔 (Lanarkshire, Scotland)의 귀족이었는데, 자신의 해밀턴 팰리스에 이 아프로디테상을 비롯한 여러 고대 미술품을 진열해 놓고 살았던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부와 권력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이 집안의 가세가 기울며 1920년 이 팰리스는 철거되었고, 그의 소장품들은 신흥 부자들에게 팔려 나갔습니다. 해밀턴 아프로디테 석상은 미국 라디오 재벌이었던 윌리엄 허스트 (William Randolf Hearst)가 투자 목적으로 매수한 후 자신의 뉴욕 창고에 이십여 년간 간수했습니다. 그 이후 뉴욕의 고미술 거래상이었던 조세프 브러머 (Joseph Brummer)가 다시 구매를 했는데, 브러머가 죽자 그의 아프로디테의 석상도 다시 경매에 나왔습니다. 그것이 72년 전 일입니다. 그 이후 "소재 미상"의 작품으로만 기록돼 있었던 이 로마 유물이 2021 년 갑자기 다시 경매장에 다시 나타났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가 수많은 조각상들을 배출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남성을 묘사할 때에는 젊고 우람한 근육질의 누드 조각들을 만들었습니다. 당대 최고 인기 올림픽 선수들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반면 여성들은 모두 전통적인 그리스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에 프락시텔레스 (Praxiteles)라는 조각가가 비너스 여신상을 만들면서 그 불문율을 깼습니다. 두 개의 비너스상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전통을 따라 옷을 입은 모습으로 조각했고, 또 하나는 목욕을 하기 위해 옷을 벗은 모습의 비너스를 만든 것입니다. 벌거벗은 비너스의 옆에는 옷이 놓여 있고, 무게중심은 한쪽 다리에 실은 채, 머리는 옆을 향하며,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살짝 가리는 포즈로 조각했습니다. 소위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Aphrodite of Cnidus)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비너스 푸디카라고 부르는 그 석상의 포즈가 사람들의 이목을 크게 끌었습니다. 특히 당시 갑자기 서유럽과 지중해 전역을 제패한 이웃 로마인들이 이에 열광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작가 플리니 (Pliny)가 이 석상을 자세히 표현하면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로마인들은 그리스 조각들을 본떠서 수많은 석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당연히 크니도스의 비너스를 흉내 낸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여신을 로마에서는 비너스라고 부르면서 말이지요. 해밀턴 아프로디테 (비너스)도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짝퉁 조각이 이렇게 주목을 받을 수 있느냐고요? 원본인 크니도스의 비너스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존 상태가 좋은 로마의 비너스/아프로디테상이 고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크니도스 아프로디테를 모방한 고대 석상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손상되지 않은 작품들은 많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로마의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있는 카피톨리니 비너스 (Capitoline Venus)와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메디치 비너스 (Medici Venus)가 그나마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어요. 해밀턴 아프로디테도 원형이 보존된 경우는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목 부위에 금이 가 있는데, 아마도 원래의 머리는 부러져 소실됐고, 누군가가 비슷한 대리석으로 만든 또 다른 조각을 가져다 꿰어 맞추었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비너스 푸디카 포즈에서 시작해 서양 미술가들이 누드 여성을 묘사하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이는 서양 미술사를 걸쳐 가장 인기 있는 포즈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 그림인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의 <비너스의 탄생>을 예로 들어 볼까요 (아래 그림 참조).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인데요, 그 중앙에 서 있는 여신은 전형적인 비너스 푸디카 포즈를 하고 있습니다. 화가가 왜 이 포즈를 사용했을까요? 르네상스라고 하면 성경책 이야기 묘사에만 집중하던 중세 미술 전통에서 벗어나 인간의 아름다움도 미술로 찬양하자는 움직임이었잖아요. 그 당시 화가들이 답답한 중세 미술에서 영감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의 그리스 및 로마의 미술적 전통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티첼리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미녀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비너스 푸디카 포즈만큼 아름다운 것이 더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손으로 몸을 가린 포즈가 관능미를 감추는 듯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더 배가하기 때문이지요.
그 이후에도 비너스 푸디카의 인기는 계속됐습니다.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많은 미술품을 약탈해 갔는데요, 그 리스트의 정점에 비너스 푸디카의 대표적인 석상인 카피톨리니 비너스가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 중앙). 나폴레옹이 이 석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1797 파리에서 승리의 시가행진을 하면서 이 비너스 석상을 앞세웠다고 전해집니다. 비너스 푸디카 석상 중에서도 특히 보존 상태가 좋았던 카피톨리니 비너스를 빼앗긴 이탈리아인들은 그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안토니오 카노바 (Antonoi Canova)에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석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카노바의 작품이 비너스 이탈리카 (Venus Italica)입니다. 카노바는 당대 유럽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으니 그저 또 하나의 짝퉁 비너스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고전적인 비너스 푸디카처럼 머리는 왼쪽으로 향하고 무게중심은 한쪽 다리에 둔 모습이지만 벗은 몸을 가리는 동작에 조금 변화를 주었고 또 몸을 가리는 옷감의 재질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카노바의 비너스 조각이 크게 인기를 끌며 그의 작업소에서는 비슷한 조각을 여럿 만들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습니다 (아래 그림 오른쪽). 하지만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카피톨리니 비너스와 카노바의 비너스 이탈리카는 해밀턴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에 미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얼마 후 나폴레옹 정권은 결국 몰락했고 프랑스는 약탈한 카피톨리니 비너스를 이탈리아에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술가들이 수많은 여성 누드를 표현했습니다만 19세기까지는 또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어요. 누드로 표현된 여성들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여신 아니면 요정들이었습니다. 이 불문율을 깨서 크게 주목을 받은 화가가 프랑스 인상파의 일원이던 에두아르드 마네 (Edouard Manet)입니다. 그의 커다란 유화 작품 <풀밭 위의 점심> (Luncheon on the Grass)은 한 여성과 두 남성이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광경을 묘사했습니다. 남자들은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그 옆에 앉은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상태에서 관객을 바라봅니다 (아래 그림 참조).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 여성의 모습을 누드로 표현했다고 해서 1863 년 프랑스의 한 미술 전시회에서 크게 논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 이후 마네는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됐고, 논란은 세월이 지나며 가라앉았습니다. 미술 애호가들은 여성 누드에 대해서도 더욱 관대해져 이제는 미술계에서 흔하디 흔해진 것이 여성 누드입니다.
이러한 여성 누드 미술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 크니도스의 비너스이니 그와 유사한 포즈의 고대 석상들 중 보존 상태만 좋다면 세계의 주요 박물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습니다. 해밀턴 비너스는 2021년 중국계 에이전트를 통해서 어느 익명의 재력가가 2천4백6십만 불을 제시해 낙찰을 받았습니다. 투자를 목적으로 매입되는 많은 예술품들은 세금 특혜가 있는 나라의 창고로 직행하며 미술 애호가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곤 합니다. 그런데 해밀턴 아프로디테의 경우는 매입자가 2028 년까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여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박물관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는 길목에 이 역사 깊은 석상이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2028 년 이후 이 석상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걱정을 하면서,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이를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히 생각하며 저는 오늘도 이 전시관을 둘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