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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데코 <지혜>가 있는 록펠러 센터

by 류형돈

뉴욕시의 문화유산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이 20세기 초반 세계 석유산업을 독점해서 세계 최대의 부를 축적했던 록펠러 (Rockefeller) 가문입니다. 이 가문은 미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이후 첫 20여 년은 유럽 미술작품을 수입하거나 유사품을 만드는데 많은 돈을 썼습니다. 그 후 1930 년대 들어서야 뉴욕의 독특한 문화유산을 짓는데 눈을 떴는데 이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록펠러 센터입니다. 이곳에 있는 당대 최고의 동상과 부조들이 20세기 초반의 미술 트렌드를 그 어느 곳보다 잘 보여줍니다.


록펠러 센터는 맨해튼의 48가에서 51가에 걸친 건물군이니 이곳 구석구석에 볼거리가 많습니다만 관광객들에게는 그 중앙에 위치한 록펠러 센터 플라자가 단연 하이라이트로 꼽힙니다. 겨울철에는 이 플라자 중심에 위치한 움푹 꺼진 공간에 하얀 얼음을 덮은 스케이트장이 차려집니다. 이 광장의 동쪽 끝에 사진을 찍겠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섭니다. 멋진 스케이트장의 하얀 얼음이 그 반대편에 위치한 순금으로 도금된 타이탄 신족 프로메테우스 동상의 색상을 더욱 부각하기에 이를 사진에 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이 프로메테우스상 뒤편에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들어서면 이곳은 말 그대로 빛나는 관광명소로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합니다.

록펠러 플라자 아이스 링크의 황금빛 프로메테우스 동상과 크리스마스트리.

5.5 미터 크기의 이 프로메테우스는 오른손에 불을 쥐고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포즈를 하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바로 밑에는 태양의 궤도를 상징하는 동그란 원이 있고요, 그 원 표면에는 12개의 별자리가 표시돼 있습니다. 그 아래로는 땅을 상징하는 산이 있고, 그 주위로 바다를 상징하는 분수대가 있습니다. 그 뒤의 대리석에는 "모든 예술의 스승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전해줌으로써 미약한 인류에게 강력한 수단을 제공하였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우스 신의 뜻을 거역하면서 태양에서 불을 가져와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던 그리스 신화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프로메테우스상은 1934년 폴 맨십 (Paul Manship)이라는 조각가가 디자인한 작품입니다. 이 동상 자체는 당시 미술 평론가들에게서 혹평을 받았다 하는데 그 황금빛 색상이 아름다운 록펠러 플라자의 배경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우러져 미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조각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공간이 창출하는 분위기의 중요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군요.


록펠러 센터를 통틀어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예술가는 당시 최고 명성의 조각가 리 로리 (Lee Lawrie)입니다. 그는 록펠러 센터의 디자인 컵셉트에 딱 맞는 전형적인 아트데코 조각가였습니다. 아트데코라 하면 사실적 묘사를 중시하던 19세기 전통을 벗어나 보다 단순하고 간결한 묘사를 추구하는 1930 년대 미술 트렌드였죠.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조명을 받는 것이 아마도 5번 애비뉴 선상에 위치한 근육질의 아틀라스 (Atlas) 조각일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아틀라스 역시 타이탄 신족이었고,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며 별들의 비밀을 누설했다 하여 천구를 받드는 벌을 받았다는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그 천구에는 프로메테우스상처럼 12개의 별자리가 있습니다. 보디빌더의 체형으로 근육을 과시하는 모습이 서양 조각 전통을 충실히 따른 듯하면서도 그 선이 상당히 간결하고 단순해 만화 캐릭터와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것이 아트데코 조각의 진수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동상 자체도 훌륭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록펠러 센터 콤캐스트 빌딩과 세인트 폴 성당 때문에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는 작품입니다 (아래 사진).

아틀라스 동상. (좌) 정면에서 록펠러 센터 콤캐스트 빌딩을 배경으로 한 모습. (우) 세인트 폴 성당이 배경으로 보이는 뒷모습.

이곳의 리 로리 대표작으로서 프로메테우스상 뒤에 있는 콤케스트 빌딩 (일명 30 Rock 빌딩)의 부조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정 중앙에는 <지혜 (Wisdom)>라는 부조가 있고, 그 양 옆으로 조금 더 작은 부조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색상이 화려한데 리온 솔론 (Leon Solon)이라는 예술가가 리 로리의 조각에 도금을 하고 여러 색을 입혔기 때문입니다. 왼쪽의 부조는 어떤 인물이 소리를 듣는 시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음파가 보입니다. 사운드 (Sound)라 명명된 작품인데, 1930 년대 최첨단 제품의 상징이었던 라디오를 청취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아래 그림 왼쪽). 이 부조가 이 건물 벽면에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록펠러 센터에서 가장 높은 이 건물의 당시 주인이 미국에서 라디오를 생산하던 RCA (Radio Corporation of America)라는 회사였거든요. <지혜> 부조의 오른쪽에는 구름 위에서 빛을 발하는 여신의 부조가 있는데, 라이트 (Light)라 명명된 작품으로 이는 텔레비전과 영화를 상징한다고 하네요 (아래 그림 오른쪽). RCA가 후에 컬러텔레비전 개발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니 건물주의 관심 분야를 미술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회사는 지금으로 치면 테슬라 또는 애플과 같은 지명도를 자랑하는 최첨단 테크 기업이었던 것입니다.

콤케스트 빌딩 (30 Rock)의 부조. 사운드 (왼쪽)과 라이트 (Light, 오른쪽).

1980 년대 이후 일본 전자 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 RCA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록펠러 센터에는 이 회사가 남긴 큰 족적이 있습니다. RCA가 NBC (National Broadcasting Company)를 자회사로 창립한 후 이곳이 방송계의 중심지로 발전했거든요. 미국 최고 인기의 코미디 쇼 <Saturday Night Live>, 아침 방송으로 미국 최고 인기를 누리는 <투데이 쇼 (Today Show)>, 그리고 한국 유명 연예인과 영화감독들도 가끔씩 출연하는 최고 인기 토크 쇼 <지미 팰런과 함께 하는 투나잇 쇼 (Tonight Show with Jimmy Fallon)> 등등이 이곳의 NBC 스튜디오에서 제작됩니다. 즉 이곳에서 NBC가 미국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겁니다.


리 로리의 다른 작품들이 이곳에 다수 있지만 제 눈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지혜> 부조입니다. 이 작품은 긴 수염을 가진 근육질의 인물을 전형적인 아트데코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오른손으로는 컴퍼스를 이용해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왼손으로는 무지를 상징하는 구름을 제침으로써 햇빛이 세상을 밝힐 수 있도록 합니다. 즉 과학의 힘을 이용해 세상을 밝히겠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가 너희 시대를 평안하게 하리라 (Wisdom and knowledge shall be the stability of thy times)".


이는 구약성경의 이사야 33장 6절 "Wisdom and knowledge will be the stability of your times, and the strength of salvation; the fear of the Lord is thy treasure"에서 따온 문구입니다. 그렇다면 긴 수염이 달린 인물이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일까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네요. 평론가들은 이사야 33장에 나오는 문장에서 구원 (salvation)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 (fear of the Lord)라는 문구가 빠진 것에 주목합니다. 다민족 사회에서 사업을 하던 록펠러 가문 입장에서 볼 때 종교적 색채를 지우는 것이 좋을 거라는 판단을 한 것이죠. 또 다른 힌트는 이 인물이 쥐고 있는 컴퍼스에 있습니다. 컴퍼스를 쥐고 있는 신의 모습이라 하면 18세기 영국의 화가 겸 작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책에 나오는 이성과 논리의 신 "유리즌 (Urizen)"이 잘 알려져 있거든요. 리 로리의 <지혜> 부조와 블레이크의 그림 <The Ancient Days>은 둘 다 하얗고 긴 수염의 인물과 그를 둘러싼 어두운 구름, 그리고 손에 쥔 컴퍼스를 묘사합니다 (아래 그림). 리 로리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리즌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 틀림없는 듯합니다.

(좌) 록펠러 센터 콤캐스트 빌딩 입구의 부조 <지혜(Wisdom)>. (우) 윌리엄 블레이크가 묘사한 이성과 논리의 신 유리즌 (Urizen).

블레이크가 창작한 신화에는 4명의 신이 등장하는데 그중 비이성적인 세상에 불만을 품고 물리 법칙 및 법률을 창조한 존재가 유리즌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중요시하는 작가였으니 인간의 본능과 감성을 무시하고 차가운 법률과 수학만 고집하던 유리즌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리 로리와 록펠러 가문은 블레이크의 원래 의도를 무시하면서 컴퍼스를 쥐고 있는 이성과 논리의 상징을 록펠러 센터의 중심에 갖다 꽂아 록펠러 플라자의 구심점으로 만들었군요.


이쯤 보면 록펠러 센터의 조각들이 서로 연관이 없는 개별 예술품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불을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 별들의 비밀을 알려준 아틀라스, 그리고 컴퍼스로 무장하고 이성과 논리를 설파하는 유리즌이 끝없이 계속되는 인류 지식의 발전을 상징합니다. 이 나라 국민들이 록펠러를 세운 이들과 세계관을 공유해서였는지 미국은 이후 세계 과학계를 선도하면서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록펠러 센터는 비록 얼음같이 차가운 유리즌의 과학을 찬양했지만 이를 지극히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아트데코 양식으로 표현했기에 거의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 예술을 사랑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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