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오사카→히메지→고베→오사카
둘째 날이 밝았다. 원래 7시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막상 눈을 떠보니 웬걸, 어찌 된 일인지 8시 반이었다. 나는 보통 여행을 할 때는 시간을 최대로 사용하고자 볼거리들의 오픈 시간에 찾아가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었는데 본격적인 여행 시작부터 이렇게 돼서 잠시 침대에 멍하니 앉아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다. 내가 이러면 안 돼, 하는 생각에 얼른 준비를 하는데 TV를 틀어보니 드래곤 볼을 방영하고 있길래, ‘음 조금만 볼까’ 하다가 결국 그 회차를 다 보고 나서야 엉덩이를 일으켜서 길을 나섰다.
히메지는 오사카에서 기차로 한 시간~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행정구역상 지금은 효고현 히메지시이고, 바로 여기에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12개 성 중의 하나인 히메지 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제대로 남아 있는 성이 별로 없고 시그니쳐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가진 것도 없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은 그야말로 전 국토가 조각조각 나뉘어서 군웅할거를 했기 때문에 수많은 성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하나의 정형화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이라니 가는 길 내내 너무 기대가 되었다.
본격적인 이번 여행의 시작인 히메지 성에 당도하니 성의 안내도가 나를 반겨준다. 이제 여행 시작!
성 내부로 들어가니 저기 서 있는 성의 본 건물이 보인다. 이 성의 별칭은 백로 성인데 하얀색으로 외벽을 칠해놨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백로가 날개를 펴고 앉은 모습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과장 같다. 이런 식으로 성에 별명이 붙는 건 비단 히메지 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본의 성에도 마찬가지로 주로 색깔을 기준으로 새 이름이 별칭으로 되어 있다. 까만색으로 칠해진 마쓰모토성(여기는 히메지 성을 본 다음 7년 후에 여행하게 된다)은 까마귀 성인 식으로. 내리쬐는 햇살은 강렬했지만 그 햇빛을 가득 받아 하얗게 빛나는 히메지 성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색깔 때문인지 몰라도 어딘가 은은한 슬픔이 감도는 느낌이 있어 더욱 인상이 강렬했다.
하얗게 빛나는 히메지 성의 텐슈카쿠.
오리지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 물론 아니고, 최초 축조된 14세기의 요새는 이후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치다가 2차 대전 후 대대적인 해체-복원 작업을 한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6세기 말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감정은 별로 좋을 수가 없지만 그와 별개로 멋진 건 멋진 거다. 그리고 간단히 히메지성이라고 부르지만 성이라고 부를 때는 건물과 성벽, 망루, 해자까지 포함한 영역을 이르는 것이고 우리가 흔히 성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텐슈카쿠(天守閣, 천수각)로 유럽의 성으로 치면 keep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성이 원형 그대로 살아남은 건 그야말로 억세게 운이 좋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은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고 그 폭격에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된다. 교토쯤 되는 도시야 물론 문화재의 보호를 위해 남겨뒀지만 히메지는 미군 입장에서 중요한 문화재가 있는 도시도 아니기에 그냥 공습의 대상이 되었는데도 그 폭격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원자폭탄을 맞았어도 항복을 안 했다면 교토고 뭐고 다 폭격해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이 성은 일본에 원형이 남은 12개 성 중에서도 드문 5층의 구조를 갖고 있는 건물이다. 누각 안에 들어가서 올라가 볼 수 있는데, 실내는 모두 반질반질한 목재 바닥으로 되어 있어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고 너무 반질반질해서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한다. 사실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나무와 기와로 지은 누각이 얼마나 방어 건물로서의 효용을 가지고 있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일단 목조이기 때문에 불에 너무 취약하니 멀리서 불화살만 쉭쉭 날려준다고 해도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방어군은 꼼짝달싹 못하고 통구이가 되는 걸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목재라고 해서 불이 쉽게 붙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성이 본격적으로 축조된 16세기는 우리도 알다시피 이미 화약무기를 사용하고 있던 시절이다. 또 16세기가 아니라 그 한참 이전부터 동서양에서는 화공을 사용할 때 유황이나 염초 같은, 이런저런 인화물질 등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그리고 농성하는 입장에서 이미 성벽이 뚫리고 이 텐슈카쿠까지 적이 육박해 들어왔다면 구원군이 오지 않는 한 상황은 이미 끝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니 원군이 도착한다는 가정하에 최대한 시간을 버는 용도로 한정하는 게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참 히메지 성 내부와 텐슈카쿠를 구경하고 나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다시 한번 텐슈카쿠를 돌아보았다. 현재도 현대의 히메지 시 안에서는 어디서나 보인다고 하는데 이런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니 정말 부럽다. 오래전 NBA팀인 Seattle Supersonics에 Sam Perkins라는 선수(이 사람의 대학 동창은 그 유명한 Michael Jordan으로, 또 다른 스타플레이어인 James Worthy까지 세 명이 함께 뛴 1982년 North Carolina 대학은 우승을 차지한다.)가 잡지에 기고한 글 중 ‘멋진 정도’라는 글이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농구와 재즈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조건 멋지다 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재즈와 농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조건 멋지다는 데에 나도 동의하지만, 이 히메지 성은 그런 사람보다 백배쯤은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전 일정은 끝이 나고, 이제 오사카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또 다른 도시인 고베로 향했다. 히메지 성에서 나오자 해는 머리 위로 높이 떠서 사정없이 내리쬐고, 습도가 높아 체감 온도는 40도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습식 사우나 그 자체, 주변에서 ‘일본 여행은 여름은 피하는 게 좋지 않겠어?’라고 했던 충고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뙤약볕을 뚫고 기차를 타러 기차역으로 가서, 같은 플랫폼에 각각 다른 행선지의 열차가 다양하게 들어오는데 그만 잘못 타는 바람에 중간에 내려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만 했다. 이번에는 한자를 잘 확인했지만 왠지 불안해져서 내가 타고 있는 차량의 객실 내부를 둘러보니 승객들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만 몇 명이 있어 일본인들의 영어실력을 감안해서 가장 젊어 보이는(대략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여자한테 ‘이 기차 고베로 가는 거 맞지?’라고 물어보았다. 역시 친절함이 몸에 철저하게 밴 일본인답게 안 되는 영어에도 너무 친절하게 가르쳐줬다(내가 물어본 건 한 문장인데 대답은 거의 열 문장이 돌아온 듯). 결론은 맞다는 얘기여서 안심하고 내 자리로 돌아가서 앉아 한가로이 음악을 듣고 있는데 조금 뒤 그 여자애가 나한테 와서 조그만 쪽지를 내밀었다. 펴보자 내가 탔던 역에서부터 고베까지의 모든 정차역과 각 역에 도착하는 시간이 적혀 있는 메모였다. 아 이럴 수가… 일본인들의 친절이야 유명하지만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뭐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를 진심을 담아 말해줬다. 조금 뒤 자기는 먼저 내린다며 이 날 그녀에게서 들었던 영어 중 가장 유창한 발음으로 ‘Good Bye’라고 하고 내렸다.
그렇게 해서 고베에 도착. 고베에서의 목적지는 차이나타운인 난킨마치와 기타노이진칸이다. 난킨마치는 간사이 지역의 유일한 차이나타운이고 기타노이진칸은 옛 외국인들의 거주구역이니 일본에 여행을 왔는데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 수 있는데 고베가 이런 곳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할 즈음 일본이 개항한 도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단 개항을 하고 나자 좋은 입지와 더불어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적극적인 해외 문물 받아들이기와 시너지가 났는지 급성장을 하고 무역항으로 굉장한 성공을 거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며 척화비를 세운 우리나라와 개항을 하고 탈아입구(脱亜入欧, 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으로 들어간다)를 외치며 빠른 속도로 개혁을 달성한 일본. 자못 슬퍼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아닌 타국의 영향으로)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이념대결 내전으로 북한이 일으킨 6.25를 겪으며 나라가 다시 한번 초토화되고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는데… 슬픈 역사다. 세계 최초의 인쇄술과 다연장로켓인 신기전과 철갑선인 거북선(물론 거북선은 정말 철갑선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고 지금은 철갑선이 아니었다는 것에 더 무게가 실려가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 등 자랑스러운 발명품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지만 전체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외세의 침략으로 슬픈 일의 연속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지배계층의 모럴 해저드까지 겹쳐서 눈물이 마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다시 고베 얘기로 돌아가면 일본의 유명한 와규가 특산품인데 고베규라고도 부른다. 사고로 저세상으로 떠나간 LA Lakers의 Kobe Bryant의 이름이 바로 이 고베에서 따왔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물론 ‘고베’이지만 영어 발음으로 읽자면 ‘코비’가 되긴 하지만. 와규는 한자로 화우(和牛)인데 ‘화’ 자는 일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개념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한우 같은 작명인 셈.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고기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와규를 먹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에 4개밖에 없는 차이나타운의 하나인 난킨마치에서 뭐든 먹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난킨마치의 초입으로 걸어갔다.
난킨마치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느 차이나타운과 다르지 않다. 물론 차이나타운도 어느 정도는 현지화를 하게 되어 있으니 일본의 느낌이 나는 건 당연하지만. 해외에서 차이나타운을 방문하면 꼭 액자식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외국에서의 또 다른 외국이니까.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거리 구경을 하고 있는데 이때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있는 시간이라 심히 배가 고파와서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적당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라멘과 볶음밥 세트를 먹었다. 면을 심하게 사랑하는(게다가 내 입은 고상함이나 식도락을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막 입이라 메뉴를 고를 때 고민할 필요도 별로 없어 더더욱 편하다) 나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맛이었는데, 해물로 우려낸 육수를 베이스로 한 국물에는 매콤한 맛이 감돌아 볶음밥과 먹기에 정말 좋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여정. 기타노이진칸쪽을 볼 차례다. 기타노이진칸(北野異人館)은 그야말로 즉물적인 이름으로, 일본어니까 이국적으로 들리긴 하는데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북야이인관이고 직역하자면 북쪽에 있는 외국인 주택(들)이 된다. 상상력이 없어도 너무 없는 작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특이한 사례도 아닌 게 다른 나라들에도 예를 들어 French District, Muslim Quarter 같은 이름이 흔하니 기타노이진칸이라고 해서 특별히 비난받을 건 못 된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런 곳에 대체 어떤 이름을 지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이런 곳이 있다면 ‘외국인 거리’쯤으로 작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으니까. 어쨌든 문자 그대로 고베시의 북쪽에 개항 후 외국인들이 모여서 살았던, 각국의 특색을 가진 이국적인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각국의 무역상 등이 살았던 집들이 즐비하게 있고 일부는 요금을 내고 들어가 볼 수도 있다. 각국의 양식이 들어가 있는 다양한 모습을 한 주택들의 사이를 걷고 있자니 상당히 유쾌한 기분이었다. 내부에는 당시 집주인들이 모아 놓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백 년쯤은 되어 보이는 루이뷔통 가방이라던가 조각 같은 수집품, 사냥꾼이었던 사람의 집에는 동물 박제가 한가득 있는 식이다.
그렇게 고베 구경을 어느 정도 마치고, 슬슬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한 시각에 롯코산으로 향했다. 굳이 오르지 않아도 되는 롯코산을 갈 생각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여행 전 일본 대사관에서 구한 고베 관광 팸플릿에 바로 이 롯코산의 야경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 사진 하나에 홀려 ‘아, 고베에 가면 꼭 이 야경을 보러 가야지!’ 했던 것이다. 그래서 케이블카를 타고 롯코산에 올라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지만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하루 종일 삼각대까지 메고 다닌 나는 매우 의욕에 불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전망대에 올라가서 맞이한 고베의 야경은 팸플릿의 사진과 전혀 달랐고(팸플릿의 절반 정도만 되어도 좋았으련만) 내리는 비에 몸은 젖어가지 삼각대에 카메라를 마운트하고 사진을 찍고 있자니 정말 속은 기분이었다. 산 이름조차 ‘롯코’, 한자로는 ‘六甲’, 우리 독음으로는 ‘육갑’이 되어 그야말로 절묘했다. 비까지 오는데 이거 보려고 하루 종일 삼각대를 낑낑대며 메고 다닌 내 모습을 지칭하는 것 같아서.
한심스러운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야경 사진 하나 건졌어(흑흑),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고베 시내로 와서 화풀이하듯 텐자루(텐푸라+자루소바 세트)를 먹고는 다시 오사카로 돌아갔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열 시 반, 하루 종일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다음날 여행지인 나라의 정보를 맥주를 마시며 읽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