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오사카→나라→오사카
전날 하루 종일 삼각대를 메고 다녔던 여파인지 어깨가 아련히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 날도 역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역시 전날과 같은 시간대에 하는 드래곤볼을 봐 버린 후(여행까지 가서… 왜죠?) 길을 나섰다.
이 날의 목적지는 나라였다. 한자로는 내량(奈良)이고 일본어 음독이 ‘나라’인데 이게 바로 우리나라의 영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가를 뜻하는 우리말 ‘나라’가 그 먼 옛날 고 한국어에서도 현재와 똑같이 ‘나라’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설령 비슷한 발음이었다 할지라도 어차피 일본어의 음독은 한자의 발음을 흉내낸 것이라 우리말 독음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정말 우리말의 나라가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가 되었고 일단 그렇게 부르다가 한자로 도시 이름을 쓸 때 나라에 맞는 한자를 찾아 내량이라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리적으로 대륙에서 반도로, 그리고 섬으로 문화가 전파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니 초기의 일본은 우리나라의 영향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었겠지만 이 ‘나라’라는 도시 명칭이 우리에게서 전해진 것이다는 설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나라는 710년 최초로 일본의 수도가 되어 교토로 천도할 때까지 약 75년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발전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백제가 일본과 인연이 깊은 편인데 서로 문화와 군사 교류를 활발히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라가 수도가 된 8세기 초에 한반도는 이미 삼국시대를 종결시킨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어제의 동지이자 오늘의 적인 당나라까지 물리치고 통일 국가를 이룬 지 5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아마도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망국의 한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정착했을 텐데(지리적으로 고구려인들은 일본보다는 만주 벌판으로 도망가서 유민이 되고 후에 발해를 일으키는 건 이 고구려계 사람들) 50년이라면 이민 2~3세대가 태어나 살고 있을 시점이고 특히 도망친 것은 왕족, 귀족 등 지배층이었을 가능성이 크니 일본의 정치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재밌는 사실은 후에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를 한 왜왕 간무는 모친이 바로 백제 무령왕(무령왕릉의 그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간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백제계라는 사실이다. 정작 무령왕도 일본에서 태어난 후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니 이래저래 깊은 인연이라 하겠다. 무령왕의 출생은, 진위를 비롯해서 여러가지로 논란이 많은 역사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은 어찌 되었든 나라에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많고 또 유명한 나라공원의 사슴들도 있다. 얘네들은 사람과 어울린 지가 너무 오래되어 가축화되어서 도무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도처에 사슴 먹이인 시카센베를 파는데 이제나 저제나 관광객들이 시카센베를 먹여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꽃사슴이라 예쁘기는 한데 뭐랄까 너무 야생성을 잃어버려서 먹이를 바라며 우렁찬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사슴들을 보면 흠칫한 기분도 없잖았다.
긴테쓰 나라역을 나와 역을 등지고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고후쿠지(興福寺, 여복사)가 이 날의 첫 번째 목적지였다. 이 절은 나라를 도읍으로 삼은 710년 교토에서 이전한 것으로 그야말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는 무려 175개의 건물을 거느린 대사찰이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인해 현재는 열 두 개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중에 가장 멋진 자태를 뽐내는 건 고주노토(五重塔)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목조탑인데 굉장히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절의 경내를 둘러보면서 우리나라에는 왜 목조탑이 없을까를 생각해 봤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고 또 역사 기록으로도 우리나라에 많은 목조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작 현존하고 있는 게 없는 거다. 대표적인 것만 해도 황룡사의 9층 석탑이 있는데 고후쿠지의 5층 탑이 50미터이니 9층 탑이면 대략 7~80미터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아 있었다면 확정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을 황룡사 9층 탑은 그만 황룡사와 함께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진다. 땅의 크기도 작은 우리나라는 한 번 전쟁이 일어나면 전 국토가 유린되는 게 순식간이어서 이런 식으로 모두 목탑들이 소실되어 버리고,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을 써서 절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보란 듯한 목탑은 더 이상 세우지 않았나 보다. 물론 종교라는 게 아무리 탄압을 하고 막는다 해도 그대로 수그러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서 숭유억불이 국가정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왕들이 꽤 많았다. 나라의 정책이 유교인데 정작 그 수장인 왕이 불교를 믿는 웃지 못할 상황.
고후쿠지에서 나와 길을 두 번 건너면 옛 나라의 중심부가 나온다. Old town인 셈인데 이 부분이 나라공원의 중심부와 겹치고, 이곳에 볼거리들이 집중되어 있다. 그 영역에 들어가면 처음 만나게 되는 게 일본식 정원인 이스이엔(依水園, 의수원)이다. 일본식 정원은 처음 보는 것이라 분재 같은 인공적인 미를 추구하는 일본은 정원을 어떻게 꾸며 놨을까 매우 궁금했다. 대학교 4학년 기말고사를 본 다음 입사하기 전에 ‘아 언제 내게 이런 자유로운 시간이 다시 올까’라고 한탄하며 다녀온 중국 상하이와 황산 여행 중 쑤저우에서 졸정원, 유원, 사자림, 창랑정 등등을 구경하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기억이 났다.
이스이엔은 크게 전원(前庭)과 후원(後庭)으로 나뉘는데 전원은 도쿠가와막부 시절인 17세기, 후원은 메이지 유신 후 20세기 초에 조성되었다. 그러니 보다 오리지널에 가까운 건 전원이고 더욱 가치가 있다. 입구를 지나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이스이엔의 전원이 눈에 들어오는데, 아 정말 포토제닉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보란 듯이 규모로 압도해 버리는 중국의 정원과는 달리 뭐랄까, 잘 정돈된 고즈넉한 정제미, 이 단어가 이스이엔을 본 나의 감상이었다.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단연 위 사진의 전경이지만, 후원으로 넘어가서도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건축도 발달하고 석재도 풍부해서 보통 정원이나 건물의 바닥을 모두 돌로 마감하는 중국식 정원에 비해 적절하게 흙바닥으로 대부분 조성해 놓은 이스이엔 쪽이 조금 더 자연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방문해 본 일본식 정원인 이스이엔은 정말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음을 갖고 있어 안전히 마음을 사로잡혔다. 곳곳에 사진 찍기 좋은 피사체들도 널려 있고.
여기서는 Tea house에서 차를 마실 수도 있는데 그 정도 시간은 안 될 것 같아서 차는 마시지 않았다. 이스이엔에서 나와 북쪽으로 곧장 올라가면 일본에서 가장 큰 부처상을 가지고 있는 도다이지(東大寺)가 나온다. 물론 그리로 가는 길 곳곳에는 사슴들이 도처에서 뛰놀며 노골적인 얼굴을 하고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터는 데에 여념이 없다. 길거리 곳곳에서 파는 사슴먹이(시카센베, 사슴전병)를 사서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야생에서의 사슴은 경계심이 매우 많은 동물이라 이들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은 기꺼이 시카센베를 사기 위해 지갑을 연다. 물론 까칠한 나는 이쁘고 귀엽다 해도 인간들과 어울리다 보니 간사해진 사슴들한테 먹이를 줄까 보냐 하는 기분이 들어 시카센베를 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뙤약볕을 받으며 간사한 사슴 무리를 헤치며 걸어가자 저 멀리 도다이지로 들어가는 관문인 난다이몬(南大門)이 보인다. 난다이몬은 13세기에 목조로 지어진 것이 남아 있어 일본의 국보인데 가까이서 보면 과연 길고 긴 세월을 이겨낸 목재만이 가질 수 있는 색감과 질감을 갖고 있어 정말 아름다웠다. 난다이몬을 바라보면서 너무 흘린 땀 때문에 부족해진 수분을 보충하려고 자판기에서 물을 하나 뽑고 있는데 누가 내 등을 툭 친다. 인간의 감각이란 묘한 것이어서 이런 한 번의 터치라도 누가 지나가면서 실수로 부딪힌 것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가령 나에게 말을 걸려고) 건드린 것인지 구분이 되는데 명백하게 후자였다. 말을 걸려고 한 것이라 해도 모르는 사람 몸에 손을 댄다는 건 굉장한 실례이므로 상당히 언짢은 기분에 눈썹을 약간 구기고 뒤를 돌아보는데 당연히 있어야 될 사람은 보이지 않고 대신 사슴이 있었다. 잠시(약 2초 정도) 상황 파악이 안돼서 멍하니 있다가 생각을 해보니 이 사슴 녀석이 나한테 먹이를 사달라는 심산으로 코로 내 등을 툭툭 친 것이다. 나 원 참 어이가 없다. 역시 인간들과 너무 가까워지면 안 되는 거였어,라고 생각하며 먹이를 사주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어쨌든 가까이 있으니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머리 쪽으로 가져가자 먹이를 주는 줄 알았는지 혀를 날름날름 한다. 결국 사슴침 닿으면 더러우니까 손 씻어야 되는데 그러기엔 너무 귀찮아서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난다이몬을 지나고 나면 도다이지의 금당인 다이부쓰덴(大仏殿, 대불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이어령 선생의 책에 정말 공감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또 대형이 필요한 곳에는 유감없이 큰 크기를 지향하는 것이 일본의 특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에도시대(18세기 초)에 지어진 다이부쓰덴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었기(1998년까지, 현대 이전으로 한정 짓자면 최대가 맞다)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전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을 때 원래 있던 금당의 30% 작게 지었다고 하니 그 전의 건물이 남아 있었다면 더욱 대단할 뻔했다. 뿐만 아니라 이 금당에 있는 본존인 다이부쓰(大仏, 대불)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상이다. 이 건물과 그 안에 들어 있는 부처상 2개가 전세계에서 ‘가장 큰’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the biggest of its’ kind라서 한정을 지어야 하니 불상 중에 가장 큰 건 아니고 청동으로 만든 상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다이부쓰덴 안에는 금당의 주인인 다이부쓰가 앉아 있다. 이 대불은 8세기 중반 주조한 것인데 당시 일본에 있는 청동의 대부분을 가져다 써야만 했다고 한다. 높이는 15미터, 무게는 무려 500톤으로 100kg 몸무게의 사람들이 500명이 모여 있는 셈이니 잘 가늠이 안 되는 지경. 자세히 보면 부처 얼굴의 색이 몸통보다 조금 짙은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후에 다시 만들어서 덧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뭐 그건 그렇고, 크기는 정말 큰데 미학 관점에서 불상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점에는 최고 수준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고로 자비가 모토인 불교의 불상은 모든 걸 포용할 것만 같은 보일 듯 말 듯 한 입가의 미소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 다이부쓰에서는 바로 그 부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본 불상 중에 최고는 우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고, 그다음이 석굴암의 본존불이다. 후에 가마쿠라를 여행할 때 본 가마쿠라의 다이부쓰가 미학적 관점에서는 나라의 다이부쓰보다 아름다웠다.
다이부쓰의 뒤편에 있는 기둥 중 하나에는 밑부분에 구멍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는 사람은 열반에 이른다는 전설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 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이 시도를 하고 있다. 이게 크기가 너무 작아서 teenager만 돼도 성공이 어려운 수준이다. 나도 한 번 시도를 해보려고 하니 이미 어깨에서부터 걸려서 포기해 버렸다. 대신 몸이 작고 아직 유연하기 그지없는 10살 아래의 아이들은 몸을 접어서 잘만 통과한다. 역시 난 깨달음을 얻기에는 너무 때가 많이 묻고 타락해 버렸나 보다.
다이부쓰덴을 나와서 니가쓰도(二月堂)와 산가쓰도(三月堂)를 구경했다. 둘 다 도다이지에 속해 있는 건물로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특히 산가쓰도는 이 도다이지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도다이지 건물군은 볼거리가 많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라는 수도로서의 기능을 한 것이 1세기도 안되긴 하지만 일본 최초의 영구 수도로 지정된 곳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고, 또 그 의미에 걸맞게 길고 긴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음 목적지인 카스가타이샤(春日大社, 춘일대사) 신사로 향했다. 도다이지를 등지고 이스이엔을 지나쳐서 남쪽으로 내려온 다음,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데 약간 외진(그래봤자 몇 백 미터 되지도 않지만) 위치 때문인지 이곳을 향하는 길에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카스가타이샤는 일본의 민족신앙인 신토(神道, 신도)의 사당인 신사인데 일본의 유명한 귀족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이 8세기에 세우고, 전통에 따라 19세기 말까지 무려 12세기 동안(!) 20년마다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도 매우 활성화가 되어 있는 곳이라 정재계의 유력인사들이 많이 방문한다고 했는데 과연 내가 방문한 시간에도 근엄한 표정을 한 정장 차림의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줄 서서 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카스가타이샤를 마지막으로 이 날의 여정은 끝이 났다. 또다시 사슴이 창궐하고 있는 사슴공원을 가로질러 나라역으로 돌아오니 이미 여섯 시가 다 되어 있었는데 너무 더운 날씨에 물과 음료수를 과다 음용해서 그런지 물배가 차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다가 여행을 끝마치자 심한 공복감이 들었다. 긴테쓰 나라역 근처의 아케이드에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보다가 중국음식점에 들어가서 칠리새우볶음과 새우딤섬을 먹었는데, 원래 맛있는 맛에다가 공복인 상태까지 겹쳐서 입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저녁을 먹은 후 기차를 타고 오사카에 있는 숙소로 돌아오니 일곱 시 반이었다. 말끔히 샤워를 하고 누워서 기린 맥주를 마시면서 이번 여행에 읽으려고 들고 간 앵거스 컨스텀의 ‘해적의 역사’를 읽었다. 일본 여행을 하면서 해적의 역사라니 조금 이질적이었지만 뭐 어때 재미있는 걸, 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맥주를 마셨다. 매우 피곤했음에도 타고나기를 완벽히 밤형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이 날도 결국 뉴스에서 날씨를 체크하고 빈둥빈둥 대다가 열두 시쯤에야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