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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죽음까지도 사랑해야 하는가

숨결이바람될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모두가 믿는 단 하나의 명제가 있다. “사람은 죽는다.” 이 명제에는 ‘완벽’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문학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사랑해. 이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야” 같은 것들과는 다르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며 역사상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고 거부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공포를 전혀 못 느끼는 듯,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던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바울. 아버지와 두 형제가 모두 의사였던 의사 집안 출신의 신경과 의사였다.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던 바울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매번 문학을 읽고 공부할 때 마다 떠오르던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더 연구하고자 예일대 의과 대학에 다시 졸업했다. 그리고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일하던 6년차에 암 진단을 받게 된다. 암으로 점점 죽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그의 인생과 가치관을 담은 책을 써냈다. 그리고는 떠났다. 그 책은 우리에게 ‘왜 죽음까지도 사랑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생각한 답을 우리가 느끼기를 바랐고, 그의 책을 통해 우리가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왜 죽음까지도 사랑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왜 죽음을 거부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먼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우리가 죽음을 거부하는 이유는 죽음이 ‘공포’ 라는 감정의 궁극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고소공포증은 낙사에 대한 공포, 폐소공포증은 아사와 산소부족사에 대한 공포, 심해공포증은 익사에 대한 공포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 올 수 없다. 그 말은 즉슨 죽음은 이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신이 살면서 이뤄 온 것들, 자신이 아직 하지 못 한 것들, 자신이 사랑하고 미워하던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에 거대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또한 ‘죽음’은 불확실성이라는 성질을 가진다. 한 마디로,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죽은 사람이 돌아와 알려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변화에 두려움을 느끼게 진화했다. 이러한 연유로 죽음 이후의 일을 전혀 모른다는 것도 우리의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죽음을 거부하는 마지막 이유는, 공포와는 거리가 멀지만, 사랑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적어도 그들을 생각한다. 그리곤 자신이 떠나고 나서 슬픔에 잠길 그들에 대해 미안해 하고, 고마워 한다. 함께 살아가며 나눈 추억들과 사랑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유산이 되고, 유산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행복한 추억들까지도 슬픈 기억으로 만든다. 어쩌면 나 혼자 죽는 것은 외로울 지언정 강력히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법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것은 사랑하는, 살아남은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왜 죽음까지도 사랑하야 하는가?’에 답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죽음까지도 사랑해야 하는가? 그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 듯,  다양한 이유를 대며 죽음으로 부터 발버둥 치려 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되려 죽음 까지의 남은 날들을 공포와 불안감으로 채우고 황폐하게 만든다. 죽음이 다가오는 동안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영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면 그 전에 이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죽음 마저도 삶의 일부임을 깨닳고 죽음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가능한 많이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것들을 잃게 될까 걱정하고 두려워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한 명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 보다 도전도 못 해 볼 일들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죽음을 잎둔 사람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이룬 것들을 잃게 됨’ 이 아니라 ‘내가 해 보지 못 한 것들을 할 기회를 잃게 됨’ 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죽음까지의 남은 시간은 매일 매일이 새로운 기회와 도전의 장이 된다. 그 순간을 사는 사람은 성취의 기쁨을 느끼고 다시금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제한한 남은 시간은 그 시간을 더 가치있게 만들고 그 시간 속에 기쁘게, 그 시간을 소중히 살기 위해서는 남은 삶을, 죽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질문. ‘어떻게 하면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를 사랑하는지. 대부분 사람들은 제대로 답하지 못 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프레임 속에 자신을 맞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리고 죽음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스스로에 대한 사고를 구체화 시켜야 한다. 스스로와의 대화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삶을 원했는지 묻고 답해야 한다. 대화를 끝 마치곤, 대화 속에서 ‘가장 하고 싶던 일’을 찾아 해야 한다. 해야 하는 일이 하니다. ‘나는 이 일이 좋아’ 라며 스스로 안위하던 일이 아니다. 진정한 ‘나’가 진실로 하고 싶던 일이다. 그리고 진실로 하고 싶던 일을 하며 스스로가 어떤 일에 행복하고 기쁜지, 어떤 일들을 하며 힘들고 고됐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나면...


 죽음을 앞 둔 그대여, 그대의 행복을 채우기에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보이는가. 그것을 알고 나먼 죽음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바울의 이야기를 읽으며 ‘죽음은 도데체 무엇인가?’ 부터 시작해 ‘어떻게 하면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가?’ 까지 죽음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고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가 아는 삶의 끝은죽음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던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은 바울이 걸어 간 길보다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이 써내려간 하나 하나의 글자들은 작은 이정표가 되어 우리를 그가 걸어 간 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 글은 내가 그 이정표를 따라가며 그의 길에 남긴 발자국이 된다.

작가 폴 칼라니티의 (글 중에는 바울로 표현)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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