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이 노랫말은 한때 우리 모두가 교실에서 불렀던 익숙한 멜로디다. 하지만 지금, 이 문장을 낭독했을 때 마음 한켠이 뻐근한 이유는 무엇일까. 스승의 날이 다가올 때마다, 감사보다는 현실의 고단함이 먼저 떠오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오늘도 교단 앞에 선 선생님들이다.
예전의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기준과 태도를 가르쳐주는 어른이었다. ‘스승’이란 말의 어원도 예사롭지 않다. 고대에는 무당이나 승려처럼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을 높여 부르던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서양의 ‘teacher’ 또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다’는 뜻에서 출발했다. 길을 제시하는 자, 보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 그것이 스승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승이라는 말은 교사라는 직함으로 단순화되었고, 교육은 지식 전달과 성적 경쟁의 전쟁터로 바뀌었다. 존경은 사라지고, 권리는 남았지만 책임은 모호해졌다.
교육의 권위가 강압으로 둔갑한 시절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체벌, 교단 위의 교사, 두발 단속, 군복 입은 교장. 스승의 권위는 도덕이 아니라 권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권력은 부패했고, 체벌은 폭력으로, 지도는 강압으로 비춰졌다. 그 결과 교사의 권위는 천천히 무너졌고, 교육의 중심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교권이 건강해졌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지난 2023년 7월, 서울 서초구의 서이초등학교에서 스물넷의 초임 교사가 교내에서 생을 마감했다. 반복되는 학부모 민원과 감정적 압박이 원인으로 지목되며, 이 사건은 전국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교사들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며 ‘교권 보호’를 외쳤고, ‘교사는 더 이상 희생양이 아니다’라는 외침이 사회를 울렸다.
이 비극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년간 누적되어 온 교권 침해와 교육의 불균형이 폭발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교사들은 더 이상 교육의 주체가 아니었고, 학부모는 소비자의 권리로 무장한 채 교실의 질서를 흔들었다.
물론 과거의 교육도 완벽하지 않았다. 치맛바람, 촌지, 체벌과 폭언이 난무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편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학생 인권 조례와 학부모 권리 보호는 그 취지 자체로는 타당했지만, 교사의 권위와 자율성을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는 너무 부족했다. 책임과 권한이 균형을 잃은 구조 속에서, 교사는 가장 약한 고리가 되어버렸다.
조선시대 율곡 이이는 『학교모범』에서 이렇게 썼다. “스승과 제자, 학우는 서로 권면하고 경계하며, 명심해야 한다.” 그는 ‘임금, 스승, 아버지’는 사람이 태어나고 배우며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존재라 하면서도, “스승의 말과 행동에 의심나는 점이 있다면 조용히 질문해 잘잘못을 가리라”고 당부했다.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존중과 비판적 사고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도 제자도, 자격이 필요하다. “스승이 올바르지 않으면 선비의 기풍이 날로 쇠퇴한다”고 했고, “배우는 자가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학당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교육이란 권리이기 이전에 책임이며, 상호 존중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깨진 사회에서, 교육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교사의 권한 회복은 단지 교사를 위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다시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을 되찾는 일이다. 학부모가 감정을 민원으로 풀기보다는, 학교와 함께 아이를 기르는 동반자가 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교육이 정치적 실험장이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공동체의 장이 되도록 사회 전체가 책임을 나누는 일이다.
스승의 날은 단지 꽃 한 송이, 노래 한 자락으로 끝나선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교사가 교육자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약속과 실질적인 제도 개선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우리 모두가 잊고 지냈던 단 한 문장에 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
이 말이 다시 진심이 되는 날을, 우리는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