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각자의 기준이 있다

장자의 사유에서 배우는 다양성과 존중의 철학

by 엠에스

<모든 존재는 각자의 기준이 있다>


장자의 사유에서 배우는 다양성과 존중의 철학

습지에서 잠든 인간은 허리가 아프다. 오래도록 누워 있다가는 반신불수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꾸라지는 그곳에서 유유히 산다. 미끄러지는 몸으로 진흙을 누비며 생명을 이어간다.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인간에게는 끔찍한 공포일 수 있다. 하지만 원숭이는 그 높디높은 가지 위에서 뛰놀며 삶의 일상을 이어간다.


우리는 종종 묻는다.

“어디에 사는 것이 올바른가? 무엇을 먹는 것이 옳은가?”

장자는 이 질문 앞에서 묵직하게 웃는다. 그러곤 이렇게 반문한다.

“그 셋 중에 누가 올바른 거처를 아는가? 그 넷 중에 누가 참된 맛을 아는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짧은 우화 속에는 그가 평생 탐구한 사유의 정수가 담겨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고 있으며, 그 방식에는 나름의 기준과 질서가 있다. 누구의 것이 옳고 누구의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기준조차, 타자의 세계에선 전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고기를 좋아하고, 사슴은 풀을 먹는다. 지네는 뱀을 달게 여기고, 올빼미는 쥐를 즐긴다. 기준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기준은 삶의 조건 속에서 각 생명이 스스로 만들어낸 생존의 양식이며,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의 기준을 고집하는가? 왜 인간의 잣대로 자연을 재단하고, 왜 자신의 관점으로 타인을 평가하려 드는가?


***


우리는 끝이 있는 존재다.

삶은 유한하고, 몸은 지치며, 경험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끝이 없는 ‘앎’을 추구한다. 장자는 『양생주』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삶으로 끝이 없는 앎을 좇으면 위태로울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한다면 더욱 위태로울 것이다.”


이는 지식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앎이 너무 자주 절대화된다는 것, 자신의 기준으로 세계를 정의하려는 오만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한계를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대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타인의 삶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존재가 처한 조건과 맥락을 이해하려는 자세, 그것이 장자가 말한 ‘제물(齊物)’, 즉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눈이다.


***


오늘의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를 산다.

다양한 문화, 언어, 종교, 가치, 정체성이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려 든다. 논쟁은 분열을 낳고, 다름은 종종 틀림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장자는 말한다. 다름은 단지 다름일 뿐이다. 그 안에는 틀림도 없고 우열도 없다. 그저 각자가 처한 자리, 살아가는 방식, 바라보는 세계가 다른 것뿐이다.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늘 자기만의 기준으로 타인을 억압하게 될 것이다.


***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살아가는 리듬과 질서를 자기 기준으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조금은 물러서서 바라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존중’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비교와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하나의 삶이다.


그러니 이제는 묻자.

누가 올바른 거처를, 누가 참된 맛을 아는가?

그 물음에 함부로 대답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장자의 지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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