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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 센 척하는가

존재의 불안, 인정 욕망, 그리고 가면 사회

by 엠에스

<왜 우리는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 센 척하는가>

― 존재의 불안, 인정 욕망, 그리고 가면 사회


‘척’이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 사회


오늘날 우리는 무언가를 ‘척’하며 살아간다. 이는 단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이자 사회적 생존 전략이다.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 센 척… 이 모든 ‘척’은 스스로가 불완전하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사회적 연기다.


현대는 ‘자기 브랜드’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다. 사람들은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자신을 포장한다. 단지 보여주는 수준이 아니라,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보인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었다. SNS, 유튜브, 자기 PR의 시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나은 버전의 나’를 연출하라고 강요한다.


우리는 이 무언의 메시지를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라는 말보다 “조금 더 있어 보이자”는 말이 훨씬 자주 들린다.


현실적 사례: 척의 사회는 일상 속에 있다


SNS에 올라오는 화려한 삶은 자주 허상이다. 빚을 내서 명품을 사고, 힘겨운 삶을 숨긴 채 “성공한 척”을 한다.


명품 브랜드 쇼핑백을 들고 사진을 찍지만, 실제로는 중고로 구매했거나 대여한 것.


회사 회의에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문화’도 ‘아는 척’의 전형이다. 이는 조직의 실수를 방치하거나, 부정확한 정보로 결정이 내려지게 만드는 위험한 구조로 이어진다.


학부모 커뮤니티에서의 ‘자녀 잘 키우는 척’은 경쟁적인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한다. 초등학생에게도 고급 영어유치원, 코딩학원, 수학 선행을 시킨다는 글에 자극받아, 내 아이도 뒤처지지 않는 척하며 무리한 투자로 이어진다.


심리학적 배경: ‘척’은 방어기제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불안을 다루는 방식을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로 설명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과잉보상(overcompensation)’이다.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아는 척을 하고, 존재감이 약한 사람이 센 척을 하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잘난 척을 한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허위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다. 즉, 우리는 척을 하면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도 이는 열등감 콤플렉스로 설명된다. 척은 단순히 교만이나 허영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의 변형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 – 칼 로저스


사회구조적 원인: 인정은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인정받고 싶어 하는가? 그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인정은 가장 부족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과거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는 소속감, 정체성, 인정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개인화된 사회’다. 직장, 가족, 종교, 이웃 공동체 모두 느슨해졌고, 사람들은 어디에도 깊이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돈다. 결국 ‘척’은 눈에 띄기 위한 신호이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몸짓이 된다.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서…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될까 봐… 그래서 잘난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


문화적 비교: ‘척’의 문화와 진정성의 문화


서구 사회에서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창피해하지 않는다.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이 교수에게 질문하면서 “I’m not sure, but I think…”라고 말해도 그것이 오히려 적극성과 진정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 사회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쉽게 평가받는다. 그래서 ‘척’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있는 그대로’보다 ‘있는 척’이 사회적 안전장치가 된다.


이 차이는 결국 교육, 문화, 언어에서 형성된 ‘존재 방식의 차이’이며, ‘척의 사회’는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적 통찰: 나는 ‘누구의 시선’으로 존재하는가


하이데거는 “우리는 대개 타인의 시선(‘세간’)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로 살아간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비본래적 존재(Das Man)’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주 ‘남이 원하는 나’로 살아가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규정한 삶을 따라간다. ‘척’은 그 비본래적 존재의 대표적 징후다. 우리는 ‘남이 기대하는 나’로 자신을 편집하고, 연출하며, 존재감을 확보한다.


“지옥은 타인의 시선이다.” — 사르트르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지옥에 스스로 들어가 살아간다.


관계의 피로: 척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척’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진짜 관계가 어려워진다. 서로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진심이 아니라 이미지로 소통하며, 경쟁은 협력을 대신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신뢰가 희미해지고, 사람은 피곤해지며, 관계는 소모된다. 결국, 우리는 자신조차도 ‘진짜 내가 누구였는지’ 잊게 된다.


어떻게 이 가면을 벗을 것인가?


① 자기 이해 – 부족한 나를 안아주기

척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자기 이해다. 나의 두려움과 결핍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가면이 필요 없어질 수 있다.


② 자기 수용 – 나답게 사는 용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다.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나는 지금 부족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강하다.


③ 진짜 관계 – 비교보다 공감

‘척’의 사회는 비교에서 출발하지만, ‘진짜’의 사회는 공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보다, 서로의 진심이 필요하다.


④ 새로운 문화 – 허세보다 진정성

사회 전반에서 진정성이 존중받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기업이든 학교든, 진실한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하는 풍토가 필요하다. ‘허세가 능력처럼 여겨지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척의 사회는 끝나지 않는다.


맺음말 ― ‘척’의 시대를 넘어 진정성의 시대


‘척’은 현대인의 자기 보호이자 사회적 생존술이다. 그러나 그 삶은 점점 더 우리를 외롭게 만들고, 진짜 나를 잃게 한다.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

“보이는 나인가, 느껴지는 나인가?”

“사랑받기 위해 가면을 쓸 것인가, 아니면 벗을 용기를 가질 것인가?”


결국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삶은, ‘척’ 하지 않아도 사랑받고 ‘있는 그대로도 괜찮은’ 세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척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당신은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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