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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른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초상

by 엠에스

<그들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른다>

― 살아 있으나 죽은 자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초상


하데스의 입구에 선 자들 ― 무기력이라는 망각의 강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이 질문 앞에 멈춰 섭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 질문을 덮어버립니다. 더 이상 물어보지도,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 있으나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진입합니다. 그 상태를 그리스 신화는 ‘하데스(Hades)’라 불렀습니다. 단지 죽은 자들의 세계가 아니라, 시간과 변화가 정지된 ‘영혼의 정지구역’이자, 자기를 포기한 자들이 떠도는 공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데스를 현실 속에서 목격합니다. “더 이상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라고 말하며 과거에만 머물거나,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그때 때문이야”라고 끝없는 회한에 빠져 사는 사람들. 계획도 꿈도 없이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하루를 흘려보내는 노인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영혼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단지 은유가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인간은 의미를 잃은 순간부터 정신적 ‘죽음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삶의 의미가 사라질 때 인간은 생존 본능조차 잃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데스는 신화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삶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희망의 소멸 ― 하데스의 문을 여는 체념


하데스에 발을 들이는 첫걸음은 ‘체념’입니다. “계획해 봤자 소용없어”, “어차피 안 될 거야”, “희망 같은 건 없어.” 이런 말들은 단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선언입니다. 체념은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무기력은 곧 시간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삶의 진행이 멈춘 것이죠.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이것을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복된 실패나 상실 이후, 사람은 스스로의 통제 가능성을 상실하고 시도 자체를 멈춥니다. 이것이 바로 하데스적 상태입니다. 시간이 멈추고, 시도는 사라지며, 영혼은 점점 말라갑니다.


노화와 하데스 ― “나는 이미 끝났다”는 자기 저주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과정이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선택입니다. 어떤 이들은 노화를 지혜의 시기로 전환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난 늙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암시를 내뱉으며 하데스에 정착합니다. 이 차이는 단지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나이가 들어서도 창조적 업적을 남긴 사례는 많습니다. 미켈란젤로는 70세가 넘어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은 88세에 수상했습니다. 나이란 숫자이지, 가능성의 마감선이 아닙니다. 노화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문턱입니다. 하지만 그 문턱에서 돌아서는 대신 주저앉는다면, 그는 스스로 하데스의 그림자에 몸을 누인 것입니다.


과거에 머무는 영혼 ― 반복되는 상처의 재방송


하데스에 갇힌 영혼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사랑, 실패한 일, 배신당한 기억. 그 상처는 “이 모든 불행이 내 탓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제공하고, 동시에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권리를 줍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상태를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 했습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시간이 흐르더라도 계속 같은 감정 반응을 유도하며, 사람을 과거 속에 붙잡아 둡니다. 이것이 바로 '하데스 병'입니다. 치료되지 않은 상처를 되씹으며, 새로운 가능성은 아예 시도하지 않게 됩니다. 상처는 기억이 아닌 현실이 됩니다.


가장 불행한 자라는 착각 ― 자기 연민의 늪


하데스에 깊숙이 잠식된 자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고립의 문장입니다. 타인의 위로는 들리지 않고, 모든 관계는 차단됩니다. 이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안락함을 제공합니다. “나는 특별히 불행하므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 연민은 책임의 포기이자 시도의 포기입니다.


이는 니체가 말한 ‘노예 도덕’과도 통합니다. 그는 “자신을 피해자로 정의하고, 고통을 미덕으로 삼으며 현실과 투쟁하지 않는 자들”을 경계했습니다. 자기 연민은 하데스의 가장 두꺼운 벽이며, 스스로를 가둔 감옥입니다.


하데스에서 벗어나는 법 ― 피를 줄 대상을 선택하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 들어가 영혼들과 대화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피’였습니다. 이 상징은 무척 중요합니다. 곧, 우리의 정성과 시간, 감정 에너지라는 ‘생명의 피’를 어디에 쏟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 에너지에 무분별하게 피를 나눠줍니다. 끝없는 불평을 토하는 사람, 늘 희망을 조롱하는 사람, 비판만 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소모합니다. 이는 나 또한 하데스의 일부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피를 줄 영혼’과 ‘경계해야 할 그림자’를 구분해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북돋아주는 ‘살아 있는 자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하데스를 인정하라 ― 그리고 떠나라


하데스를 이기는 첫걸음은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무기력, 상처, 죄책감,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 정신분석가 융은 이를 ‘그림자와의 조우’라 불렀습니다. 그림자를 외면할수록 그것은 더 강해지고, 무의식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그림자를 직면하고, 그 이유와 감정을 탐색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화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혼의 깊이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데스를 다녀온 자의 지혜’입니다. 핵심은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 다녀왔기에 삶이 얼마나 귀한지를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자는 죽은 것이다 ― 지금 당장, 작은 꿈을 꿔라


희망이 없다는 것은 삶의 지도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계획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를 정지 상태에 가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내일 한 걸음 걷기, 새로운 책 읽기, 미뤄둔 사람에게 전화하기. 이 작은 움직임이 생명입니다. 움직인다는 것, 상상한다는 것, 계획한다는 것 ― 그 모두가 영혼의 생존 반응입니다.


하데스에 갇힌 이들을 위한 손 내밀기


당신의 주변에 그런 이가 있다면, 억지로 끌어올리려 하지 마세요. 다만, 그들이 자기 그림자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옆에 있어 주세요. “괜찮아, 넌 아직 살아 있어.”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 말들이 때로는 오디세우스를 하데스에서 배에 태운 ‘바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 하데스를 잠시 다녀올 수는 있지만, 거기 머물 필요는 없다


삶은 끊임없는 상실과 회복의 반복입니다. 하데스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곳에 영영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죽은 줄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로 오디세우스입니다. 고통과 실패, 노화, 무기력 속에서도 다시 항해를 떠날 수 있습니다.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숨 쉬고 있다면, 희망 또한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희망도 없고, 꿈도 없으며, 계획도 없는 사람은 하데스에 갇힌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문에서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가능성 또한 함께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