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정치에 대해 “입법 독재”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이는 단순히 특정 정당을 향한 비난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본래의 균형을 잃고 있다는 사회적 불안, 제도가 국민의 신뢰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집단적 경고의 언어다. 마치 민주주의라는 약속이 우리의 눈앞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듯한 위기의식이다.
민주주의가 잃어버린 균형
민주주의의 본질은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다. 다수결은 하나의 도구일 뿐,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고 합의와 타협 속에서 공동체가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 정치에서 이 원리는 종종 무시된다.
국회에서는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숙의 없는 법안 처리가 반복된다. 본래 예외적 장치여야 할 ‘신속 처리 절차’가 일상적 수단으로 변질되고, 토론은 생략된 채 표결만이 남는다. 국민은 정치 과정을 ‘이미 답이 정해진 연극’으로 바라보며 냉소를 키운다.
민주주의라는 저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그 눈금은 더 이상 무게를 공정하게 재지 못한다. 이름만 남은 균형은 결국 형식적 껍데기에 불과하다.
정치 불균형이 남기는 상처
이러한 정치 운영은 국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전체를 흔든다.
(1) 정치 불신의 심화
국민은 정치가 삶을 바꾸는 수단이 아니라 소모적인 전쟁터라 여기며 정치적 무관심에 빠진다. 민주주의의 생명인 참여가 약화된다.
(2) 사회 갈등의 고착화
법이 사회적 합의의 열매가 아니라 한쪽의 승리 선언으로 비치면, 법은 규범이 아니라 갈등의 불씨가 된다. 공동체는 ‘법의 권위’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된다.
(3) 국가 정책의 불안정성
행정은 장기적 비전보다 정당의 이해관계에 좌우된다. 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고, 국민은 미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4) 법치주의의 약화
법이 정의의 상징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로 보이는 순간, 시민의 마음속에서 법의 존엄은 무너진다. 사회 전반에 규범 약화와 무질서의 위험이 퍼진다.
(5) 사법권의 독립성 침해
3권 분립에서 사법권의 독립이 엄연히 보장되어야 하나 국민의 직접선출을 빙자하여 정치가 사법시스템을 임의로 설계하여 종속적 관계로 유지하려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 속의 거울
이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입법권의 독주가 초래한 위기를 수차례 기록했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다수파인 평민회의가 원로원의 견제를 무력화하자, 결국 공화정의 균형은 무너지고 제정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기의 국민공회는 ‘인민의 이름’을 빌려 법을 남용했지만, 그것은 공포정치로 귀결되었다.
동유럽 체코 또한 1948년 다수파 공산당이 의회를 장악하자, 법은 자유를 보장하기보다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 사례들은 한 가지 교훈을 준다. 견제 없는 입법권은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파괴자가 될 수 있다.
뿌리 깊은 원인
한국 정치의 문제는 단순한 정당 간 다툼이 아니라 구조와 문화에 뿌리내려 있다.
승자독식의 제도 : 소선거구제와 단순다수제는 근소한 차이로도 모든 권력을 쥐게 한다. 절반의 국민이 곧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다.
대립적 정치문화 : 타협보다는 대결, 설득보다는 굴복이 정치의 언어가 되었다.
시민사회와 언론의 취약성 : 권력을 감시해야 할 사회적 균형추가 오히려 진영 논리에 휘둘린다.
헌정 시스템의 미비 : 상원제 부재, 입법 심사 장치의 부족으로 국회의 권한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약하다.
새로운 길을 향하여
해법은 제도 개혁과 문화의 성숙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제도 개혁 : 다당제를 가능하게 하는 선거제도 개혁, 상원제 도입, 독립적 법률 심사 기구 강화.
문화 전환 : 정치인의 협치 훈련, 언론의 공론장 회복, 시민사회의 자율적 성숙.
시민 철학 :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비판적이면서도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권리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는 성숙한 자유가 필요하다.
국가 시스템의 운영 방향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단순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이다. 독일, 네덜란드처럼 다양한 세력이 협력하며 장기 비전을 공유하는 모델은 좋은 참고가 된다.
또한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정치 과정은 더욱 투명하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국민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책을 감시하고 참여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신뢰는 투명성에서 자란다.
맺음말
입법 독재라는 말은 결국 민주주의의 균형과 신뢰가 흔들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경고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다. 국민이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주체적 시민으로 나설 때, 정치가 투쟁의 무대에서 협력의 장으로 바뀔 때, 민주주의는 다시 제 길을 찾을 수 있다.
정치철학자 존 듀이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선물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지켜내야 하는 약속이다. 저울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은 정치 제도의 개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태도이며, 거대한 이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입법 독재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의 빛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