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일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일반 현황.
지구상에 명령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동물이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개구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이다. 동화에 나오는 청개구리는 엄마 개구리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고 앉으라고 하면 일어선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뭘 하려다 누가 시키면 갑자기 하기 싫어 ‘내가 하나 봐라’ 심술을 부리며 일부러 안 하려고 든다. 어릴 적 책상에 앉았는데 ‘공부해라’라는 엄마의 말에 ‘에잇 안 해’하며 책을 덮어 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청소하려고 빗자루를 들고 있는데 이를 모르는 아내가 ‘청소 좀 하지’라고 하면 갑자기 청소하기 싫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수많은 올바른 잔소리가 실행이 안 되는 것이다.
시키면 하기 싫은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하는데 명령을 받으면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이 명령을 내리고 통제를 가하면 자꾸만 벗어나고 싶어 한다. “봐,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야. 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율성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
사실 자율성은 인간의 중요한 본능적 욕구 중 하나이다. 타인의 간섭과 침입을 막고 내 영역을 지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의사 표현도 ‘싫어’ 혹은 ‘안 해’다. 갓난아이는 배가 부르면 아무리 입에 우유를 넣어 주어도 고개를 돌리고 뱉어 버린다. 자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자지 않고 조금만 불편하게 안아도 제대로 안으라며 자지러지게 울어 댄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이처럼 뭐든지 제멋대로 하려는 아이를 사회라는 테두리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한 통제를 받으면 자율성에 심각한 손상을 생긴다. 말을 잘 들어야만 칭찬과 사랑을 주는 타인에 대한 극심한 분노와 애정을 동시에 느끼며 그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심지어 학교와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 여부도 자유롭게 결정하는 등 원하는 대로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배웠다. 그런데 정말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부모님이 시키고, 학교가 시키고, 사회가 시키고, 사람들이 좋다는 길을 걸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괜히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했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지’하며 두려워할 뿐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안에서는 자꾸만 화가 치솟는다. 남들의 눈 때문에 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나 자신이 싫은데,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통제하려고 들면 ‘통제’ 그 자체에 예민해진다. 존중받기는커녕 남들에게 또다시 휘둘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특히 어릴 적 부모의 강한 통제 속에 자라난 아이는 어른이 되어 통제받는 것을 유달리 못 견디는 경향을 보인다.
내가 빠진 내 삶.
어느 며느리 이야기다. 양반가문의 며느리로서 겪는 고생담이다. 그녀는 늘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우리 시어머니가”라는 말로 시작되었고, 그들에게 받은 상처와 숨 막히는 일들을 토로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 시댁과 친정 모두 엄하고 유난스럽기도 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으며 어떻게 살까 싶기도 했지만 그녀의 진짜 문제는 그녀 이야기에는 그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늘 그들에게 당하거나 그들과 겪은 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인데 당신의 이야기가 없네요. 그들의 이야기밖에는”
‘그들에게 휘둘리며 끌려가는 이야기 말고 그 와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당신의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의사가 충언을 했다.
자신의 역사를 쓴다는 것.
몇 년 후 그녀는 조그만 카페를 차렸다는 것이다. 물론 친정과 시댁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너는 내 딸이고 내 며느리이니 당연히 내 뜻을 따라야 해”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상황은 변한 게 없었다. 다만 그녀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그들의 역사 대신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간다는 것. 그것은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누가 함부로 대하고, 나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해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친정 부모의 횡포와 시부모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적당히 거절하고, 들어줄 건 들어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휘둘려 내 소중한 에너지를 다 써 버리는 대신 그것을 카페를 운영하고 내 삶을 살아가는 데 투자하는 것이다.
통제 소재를 내 안으로 가져와야.
그래서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려면 ‘통제 소재를 내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내가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기 싫은 일을 할 때조차도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다’, ‘내가 빨리 해 주고 넘어간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내가 그 일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대신 우리는 월급을 받는다. 그런데 ‘가족들만 아니어도 내가 이 회사를 다니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면 내가 일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일에 끌려 다니는 피해자가 되고 만다. 하지만 ‘내가 해 주는 거다’라고 마음먹고 하기 싫은 일을 빨리 해치우면 나머지 시간에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원하는 여행을 갈 수 있고, 원하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다.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에게 맞춰 줘야 하는 상황이 되면 누구나 스스로 비굴하고 초라해한다. 그런데 그럴 때도 ‘그 사람이 원해서 웃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상황을 원만하게 넘기기 위해서 웃어 주자’라고 마음먹자. 어떤 상황이든지 주체를 나 자신으로 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식 자리에 상사의 말도 안 되는 농담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까짓것 웃어 주면 어때요.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이 인생을 놓고 봤을 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상사 때문에 화를 내고 상사를 볼 때마다 불편해하고, 그에 맞춰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는데 당신의 에너지를 다 써 버리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나요? 그게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삶이 아닐 것 같은데요.”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사의 농담에 웃어 주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비굴한 느낌을 쉽게 지울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사를 탓하기만 하면 문제가 더 꼬일 뿐이다. 설령 그 사람 때문일지라도 문제의 원인을 확인하는데 치중하지 말고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해 보라.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부모도 가족도 배우자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의 탓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남의 역사가 아닌 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고,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 수가 있다.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꼴 보기 싫은 삶과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수많은 일들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짜 어른의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