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또 적응.

by 이삼오

조용했던 병동 복도에 한 두 명씩 각자 자기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힘이 없어 보이 듯, 일부는 좀비처럼 다들 향하는 곳은 식당이었다.



"오늘 메뉴는 뭘까? 밥이라도 괜찮게 나와서 다행이지..."



카를로스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나도 따라갈까 했지만 아직, 입맛이 없었다. 사람들도 조금 붐비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뒤엉키기 싫어서 그냥 복도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뭐라도 먹는 게 좋을 텐데... 배 안 고프니? 어제부터 계속 안 먹었을 거 아니야?"



데이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조금 이따 먹을게요. 식판에 제 이름이 적혀있다고 그랬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조금 조용해진 후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환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식판을 들고 자기 방으로 간 모양이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 마저 각자 따로 먹고 있었다.



내 식판을 들고 와 식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영수증 같이 생긴 종이에 내 이름, 성별, 나이, 알레르기 사항 등 제법 많은 정보들이 적혀있었다.



카넬로니(소라 모양의 큰 파스타) 안에 토마토와 치즈가 들어간 것과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 한 조각, 바나나 한 개, 쿠키 한 개, 주스 한 팩. 꽤나 괜찮은 구성이었다. 맛도 어지간한 식당보다 괜찮았다.



정말 오랜만에 입맛이 돌았다. 허겁지겁 순식간에 해치웠다. 하루 반나절을 굶은 상태에 위까지 완벽히 비워졌으니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던 모양이다.





(며칠 뒤)



"손님이 찾아왔는데, 잠깐 나와 볼래?"



데이나가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손님? 누구지? 프랜시스는 얼마 전 왔다 갔고...



개인 면담실로 향했다. 유리로 되어 있어서 훤히 보이는 이곳은 면회실로도 쓰인다.



많이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해맑게 반겨주었다. 나의 고등학교, 청소년 상담사인 '피티'였다.



"생각했던 거보다 좋아 보이네! 역시,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어."



걱정스러운 표정과 말투가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 듯 매우 밝게 나를 반겼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아, 프랜시스에게 들으셨군요."



"그래. 너 잘 지내냐고 물어보니까 머뭇거리더니 얘길 해주더구나.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푸치'가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캐나디언 클럽 VOL2, 15화 "부디 편안하길"



한동안 눈물을 빼내고 진정하고 피티의 얼굴을 보았다. 항상 그러하듯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이런 모습 보여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죄송하긴, 오히려 네가 대견스러운데. 도움을 청할 줄도 알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있고. 어떻게든 적응해 나아가려는 모습도 좋아 보이고... 너는 강한 사람이야."



항상 긍정적이고 좋은 말 뿐이다. 썩 와닿지는 않지만, 이런 말을 듣는 게 나쁘진 않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지겹고 버거울 때도 있어요. 며칠 전에 제가 이런 곳에 올 줄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또 나름 멀쩡히 지내고 있네요."



"적응을 잘한다는 건, 그만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힘든 상황에서도 무너져 내릴 수 있지만, 그런 선택을 하기보다는 어려움을 헤쳐 나아가려고 하는 거니까."






내가 적응해야 할 게 뭐가 있었을까.



세 살 때 부모의 이혼.



4년간 초등학교 네 군데와 숱한 이사, 수시로 바뀐 가족 구성원.



새어머니의 등장, 동생의 탄생.



말이 안 통하는 곳으로 이민.



종잡을 수 없었던 부모와의 대응.



전쟁터 같았던, 항상 냉한 기운이 감돌았던 집.



지금은, 대형 종합 병원에 있는 정신 병동.



그래도, 지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은 내가 만든 것이고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억울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 스스로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나는 더 단단하게 변하지 않을까.





"그런데... 저랑 만나도 되는 거예요? 원래 규정상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나면 안 되는..."



"너 지금 학교 안 다니잖아. 그리고 알 게 뭐야. 호호. 날 해고라도 시킬 건가?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잘 됐지 뭐. 호호."



역시, 유쾌한 피티다.



"아, 가기 전에, 이거 받아. 프랜시스가 전해 주라더라."



담배 두 갑. 짜슥, 고맙다.



피티를 배웅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여기 온 이후로 담배 생각이 안 났는데, 배고픔도 느꼈고 외부인과 즐겁게 대화도 나눴고, 담배도 땡기는 걸 보아하니 나는 또 적응을 해 나아가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적응 완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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