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 해적선

by 이삼오

카를로스와 샤만의 병동 투어를 마친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고, 불을 켜도 조명이 밝지 않고 은은한 무드등 같은 느낌이었다. 누워서 멍 때리기 딱 좋은 조건이다.



몸은 매우 피로했고 잠이 쏟아졌다. 그러나 잠은 들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들을 비롯하여 현재의 상황, 그리고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들이 내 머리 안에 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담당 간호사 데이나를 찾아갔다.



"정말 졸리고 피곤한데 잠은 안 와요. 진짜 죽겠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내 맥박 및 혈압 등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얼마 후 주사 하나를 준비해 왔다.



"자, 잘 들어. 이 거 맞으면 확실히 잠을 잘 거야. 그런데 일어나면 두통이랑 메스꺼움 등 부작용은 있을 거야."




"그 정도쯤이야. 네."



그러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지럽다. 속이 울렁거린다. 극심한 갈증이 느껴진다.



오 마이갓...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니... 21시간을 잤다. 인생기록이다. 그런데... 개운한 느낌이 없었다. 좀비가 된 것 같다. 몸 컨디션은 최악이지만, 걷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내 방을 기어가다시피 해서 나왔다.



무작정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병동은 기다란 U자 형태로 되어 있었다. 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벽에 의존해 가며 겨우 일어서서 걷고 있음을 인지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약에 취해있든, 술에 취해있든, 정신이 오락가락 하든, 행위 예술인 마냥 걸어 다닌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벽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게시판 앞에 멈춰 섰다. 내 이름이 써져 있는 곳에 뭔가 다름을 느꼈다. 담당의사 이름이 바뀌어있었다. 이름이... 엄청 길다. 만화 '심슨 가족'에 나오는 편의점 Kwik-E-Mart의 인도인 사장 Apu Nahasapeemapetilon 만큼이나 긴 이름이었다.



"저... 담당 의사는 왜 바뀐 거예요? 무슨 일 있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종종 바뀌기도 해. 이번 선생님은 청소년 담당을 많이 하시는 분이기도 하지."



데이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내 방에 다시 들어와서 그냥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누군가 들어왔다.



"안녕. 나는 닥터 __________라고 해. 이름이 좀, 길지? 호호. 그냥 짧게 해서 '닥터 라구'라고 부르면 돼."



작은 키에 머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한 갈래로 땋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잠자리 안경, 말의 억양을 들어 봤을 때...



"아. 네. 실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랐는데... 알겠습니다. 혹시 인도 분이신가요?"



"어. 맞아. 이름이나 내 외모나... 뭐 딱 인도인이지. 호호."



나도 유색 인종이다 보니, 캐나다에서 누군가에게 출생지나 혈통을 물어볼 때 오해 살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럼, 너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볼까? 우선 가족에 대해서 말해 볼래?"



"저희는 네 식구예요. 저와 남동생, 아버지, 그리고 제 동생 엄마요."



"아, 계모이시구나. 그럼... 서로서로의 관계는 좀 어때?"



"간단히 말하자면, 저와 제 동생은 잘 지냈고요, 아버지랑은 가끔 말은 하고, 어머니...라고 하긴 좀 뭐 하지만 그 여자랑은 무슨 말을 해본지는 꽤 오래전이네요. 지금 저는 임시로 따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지는 않아요."



"부모님과 가깝지 않구나. 아버지는 언제 재혼하신 거야?"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요. 어느 날 집에 누구를 인사시키러 데려 왔는데... 바로 직감할 수 있었어요. 새어머니가 될 사람이란 걸..."



"어린 나이에 제법 촉이 좋았구나. 그럼...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있니?"



"몇 가지 있는데 그건... "



"그래. 지금 말하기 좀 곤란하면 그건 다음에 얘기하자. 그럼 새어머니에 대해 좀 말해볼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어?"





(1990년, 충남 아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 학교는 집에서 많이 멀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여기저기 노니면서 오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넘게 걸린다.



"할머니! 나 왔어!"



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평소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낯선 여자가 평상에 앉아있었다. 옆에는 아버지가 별말 없이 앉아있었고 막내고모는 과일이랑 이것저것 내오면서 분주한 모습이었다. 할머니도 별말 없이 그냥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서 계셨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여자가 내 새어머니가 될 사람인가?



"네가 삼오 구나? 만나서 반가워. 귀엽게 생겼네."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매우 상냥하게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내 반응을 궁금해하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들릴 듯, 안 들릴 듯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 나의 첫마디었다.



이미 오래전 엄마라는 존재는 내 인생에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나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할머니, 같은 집 별채에 사는 막내고모 식구와 함께 지내는 게 좋았다. 엄마의 빈자리는 분명 있지만 나를 잘 챙겨주는 할머니와 고모들 덕에 그리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었다.



나는 나름 안정적으로 잘 지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재혼하게 되면 이 틀이 무너질 것이다. 이게 싫었다. 모르는 누군가 내 삶에 들어오는 게 싫었다.



"이건 너 주려고 사 온 선물이야."



레고였다. 와... 그냥 레고가 아니었다. 내가 맨날 학교 마치고 집에 오는 길 문구점 앞에서 서성거리게 만들었던 '카리브해 해적선'이었다. 상자에 가격표가 작게 붙어있었다. 7만 원... 90년도에 장난감이 무려 7만 원, 2학년 짜리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액수였다.



그런데 썩 기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좋아서 온 집을 뛰어다녔을 텐데... 그냥 내 마음은 집 대문을 활짝 열어 제침과 동시에 닫혀버린 모양이다. 난 커다란 레고 상자를 들고, 그냥 고개만 까딱하고 방에 들어갔다.



어린 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많이 불안했다. 저 여자랑 같이 살게 되는 건가? 레고 상자를 열고 포장들을 뜯고 무언가 조립을 하기 시작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그냥, 이 레고만 나에게 주고 다시 영영 안 봐도 될 텐데...



할머니랑 고모가 나와보라고 나에게 계속 재촉했지만 택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고집은 더럽게 셌다.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삼오야, 다음에 또 보자. 반가웠어."



"네. 안녕히 가세요."



웃음기 하나 없이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안 봤으면 좋겠는데...



할머니랑 고모가 나를 달래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 아니 니 새엄니 될 사람 좋은 사람이여. 다음에 보면 '엄마'라고 크게 불러 봐. 잉? 알겄어?"



"내 엄마가 아닌데 왜 엄마라고 부르라는 건데? 난 저 여자랑 살기 싫은데?"



"야 이눔아. 그런 말 하면 못 써! 알긋냐?"



어떠한 말로도 설득도 납득도 안 됐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우울하게 지냈던 거 같다.






"새어머니와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구나.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냥 왠지 모르겠는데. 그 어린 나이에, 내가 느끼기에 별로 다가가고 싶은 인상이 아니었어요. 엄마가 있는데 엄마라고 부르라는 것도 저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갑자기 누가 와서 앞으로 네 엄마야...라고 한다면... 많이 당황스럽겠죠."



"어린 나이부터 마음을 쉽게 열지 못했구나."



"마음을 열면, 좋은 사람과 좋은 것들도 들어올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나에게 해로운 것들도 들어올 수 있잖아요. 그럴 바엔 그냥 닫는 편이 더 안전할 거 같아요."



"흠,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다시 얘기하자."





오늘 상담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나의 멀지 않게 있는 과거를 다시 짚어보는 정도였다.



과거로 돌아가면 좋았던 기억과 추억보다는 불안과 우울함이 훨씬 더 많이 사려있다.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론, 후련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나의 고통을 정면돌파 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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