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수감자는 아니지. 웃자고 한 얘긴데 기분이 많이 나빴나? 죽일 듯이 노려보네."
나도 모르게 뭔가 욱 하고 올라왔나 보다. 가뜩이나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불청객들의 농담을 받아 줄 만큼 여유로운 마음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만 보니, 그냥 반가움의 표시로 나에게 다가온 아저씨들이었다.
"넌 뭐 때문에 여기 들어왔냐?"
구치소나 교도소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TV나 영화 같은 걸 보면, 그런 곳에서 물어볼법한 질문이긴 했다.
"아직 첫날이라... 의사가 정확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수면제를 진탕 먹고 친구들이 신고해서 왔는데... 중간중간 기억이 없네요."
"우선 내 이름은 카를로스, 여기는 샤만이야."
카를로스, 러시아 억양이 짙은 영어를 구사했다. 그런데 전혀 러시아스러운 이름은 아니다. 내가 아는 블라디미르, 보리스, 유리, 표트르, 파벨, 세르게이 같은 러시아 이름이 아닌 라틴풍이 짙은 카를로스라... 180cm를 훌쩍 넘는 키에 달라붙는 청바지와 80년대 유행했던 스타일의 가죽재킷, 그다지 길지 않은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흠, 죽으려고 작정하지는 않았구먼. 진작 죽으려고 했으면 고속도로에 뛰어들든,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손목을 세로로 긋든 했을 텐데 말이지. 아, 간혹 약으로 가버리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혼자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나에게 하는 얘기가 분명했다.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내가 정말 세상과 등 지려고 한 행동은 아닌 거 같았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이에요? 이름이 러시아인 치고 좀 독특한데..."
"정확해! 나도 내 이름 때문에 어릴 때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데. 우리 엄마가 지어준 이름인데 왠지 아냐? 스페인에 놀러 갔다가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한 남자랑 눈 맞아서 놀다가... 하튼 그 사람 이름이 카를로스였다나? 참나, 어이가 없어서..."
"아버지는 뭐라 안 하셨나요? 이름 때문에."
"거야 모르지,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도망가버렸으니."
이 분도 삶이 순탄치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만이라... 이름이 특이하네요."
"우리 아버지는 인도인, 엄마는 *뉴펀드랜드에서 온 아일랜드계야. 어때? 죽이는 조합이지? '샤'는 인도말로 왕을 의미하고, Man은 남자라는 뜻이 자나. 뭔 놈의 애 이름을 이렇게 대충 짓는다냐... 이 친구 엄마나 우리 부모나 참..."
*캐나다 동쪽,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주다. 넓은 면적과 멋진 자연을 가지고 있지만 주민들이 (실제 그렇지 않지만) 거칠고 무식하다는 편견이 있다.
"그런데, 아저씨들은 조금 건달 같아 보여도 유쾌하고... 멀쩡해 보이는데 여긴 왜 온 거예요?"
"카를로스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왔고, 나는... 지금은 좀 괜찮은데 우울증이랑 불안장애가 감당이 안 될 때가 있어서 말이지. 가끔은,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음이 터져 나올 때도 있지. 와이프의 설득 끝에 여기로 오게 된 거지."
"우리 어머니가 내 집에 있는 술병들 치운다고 7시간 동안 생고생을 했다 하네. 옆집 이웃이 깜짝 놀랐다고. 이게 정말 한 사람이 마신 술병들이냐면서... 많이 마시긴 했지... 나도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내가 여기 자진해서 왔다 하네? 술 생각 안 날 때까지 나 좀 잡아놔 달라고 했다나? 그런데 기억이 없어, 전혀."
두 사람 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왠지 한편엔 아이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모든 걸 드러내놓고 무너져 버리듯, 이 들도 삶에 있어 어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우리 따라와. 다른 수감자들도 소개, 아니 누가 있는지 알려줄 게."
1. 저기... 자기 방문 앞에서 화난 듯 혼자 중얼거리면서 쌍욕 하는 나이 많은 여자 보이지? 트리샤야. 그런데 인사하고 말 걸면 180도 상냥한 태도로 바뀐단다. 신기하지? 언제 말 한 번 걸어봐.
2. 다목적실 전신 거울 앞에서 여러 가지 포즈 취하는 여자 보이지? 저 친구는 자기애가 매우 강한 처자야. 나르시시스트가 아닌가 해... 밥 먹을 때 빼고는 하루 종일 저러고 있어. 정신은 그럭저럭 멀쩡한 거 같은데...
3. 저기 딱 봐도 우울해 보이는, 늙은 맥가이버 같이 생긴 남자 보이지? 저 친구 이름은 존이야. 말 수도 없고 항상 시선이 땅을 향해 있고 구부정한 자세로 종일 여기 복도를 걷는단다.
4. 저 앞에 우아하게 생긴 할머니 보이지? 페리 여사야. 실제로 할머니까지는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다중인격에 치매 증상도 있어. 전혀 공격적이지도 않고 외모만큼 교양 있고 우아한데... 진짜 매번 다름 사람과 이야기하는 거 같아.
"그 외엔 우리도 잘 모르겠다. 딱히 인사도, 대화를 해보지도 않았으니까. 온 지 며칠 안 된 사람도 있고, 어제 온 사람도 있고."
"아저씨들은 언제 왔어요?"
"우리는 두어 주 전에 왔어. 우리 둘 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그래서 친해지게 됐지."
"그럼 언제까지 있는 거예요?"
"딱히 정해진 건 없어. 의사와 간호사의 소견도 중요하고... 그런데 길면 한 달, 정말 길어봐야 두 달? 그다음엔 통원 치료를 하던가 아니면 더 전문적인 시설로 보내지게 되는 거지."
"더 전문적인 시설이라 하면..."
"여기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시설. 그쪽으로 가면 제대로 미친년놈들을 만나겠지, 큭큭."
"그런데... 상당히 잘 아시네요. 마치 이곳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맞아. 우리 둘 다 병원 몇 군데 있어 봤어. 그런데 우리 둘 다 내린 결론은, 여기가 그나마 제일 나아. 규율도 덜 엄격하고, 밥도 맛있고."
이 대화를 모르는 사람이 중간부터 듣는다면 진짜 죄수들이 하는 대화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이곳의 첫인상과 분위기는, 삭막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한 두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 연배가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처럼 보였다. 푸근한 인상과 가식적이지 않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간혹 환자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도 보였고 진지하게 고민을 들어주는 모습도 보였다.
아까 카를로스가 말해준 사람들에게 시선이 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욕으로, 아마도 또 다른 자신과 싸우고 있을게 분명한 트리샤...
오전 내내 거울 앞에서 별의별 포즈를 다 취하는, 마치 거울 뒤에 사진작가라도 있는 것 마냥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연출하는 처자... (이름은 모르겠다)
마치 어린아이가 심한 괴롭힘을 수 없이 당하여 불안한 모습으로 가득 찬 중년의 맥가이버 존...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왠지 그러면 이 아저씨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울어버릴 거 같은 표정이어서... 그냥 패스.
계속 60년대 때 자기 인생을, 누가 듣든 안 듣든, 아주 나긋나긋한 톤으로 혼자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페리 여사... 옆에 잠깐 다가가 들어보니 제법 흥미롭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쉬지 않고, 한치의 머뭇거림이 없이 말씀을 잘하시는지...
그 외 그냥 각자 자기 병실에서 고독함과 적막함을 벗 삼아 쭈그러져 있는 사람들...
이 공간이 주는 특별함인지는 몰라도, 나를 비롯한 여기 있는 모두는 그냥 밖에서는 일반인일 뿐이다. 누구든지 우울함을 느낄 수 있고, 수면 장애가 있을 수 있으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한다.
이곳에 있는 이 들은 모든 게 조금 서툰 사람들이 아닐까? 스스로 도우는 법을 잘 모르는... 도움 받는 게 그다지 익숙지 않은... 쓸데없는 경계심에 도움의 손길도 뿌리치려던...
나는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