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중)
나: 주최 측에서 신청곡 몇 개를 보내줬는데, 꼭 해달라네요. 아는 곡들이긴 한데 막상 저희는 한 번도 안 맞춰본 거라... 합주를 한 번 해야겠는데요?
비지 형님: 아니 행사가 당장 내일인데... 그 사람들도 참, 미리 좀 알려주지.
나: 행사 책임자도 계속 죄송하다면서 그러네요. 윗 분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거라.. 제발 좀 봐달라고 하시네요.
비지 형님: 그럼 너희 학원에서 한 번 맞춰볼까? 지금 되니?
나: 저는 수업이 없는데 문제는, 합주실에서 계속 수업 진행 중이라서요.
비지 형님: 흠, 그래? 그러면... 니가 그냥 이쪽으로 넘어올래? 어차피 H(드럼 치는 형님)도 지금 마지막 수업하고 있으니. 그리고 걔는 지금 없어. 불편해도 어쩌겠어, 그냥 하면 되지.
나: 조금 그렇긴 한데... 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관심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은 '키보드'의 학원을 가야만 했다.
그쪽 학원 현황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비지 형님과의 술자리의 대표 안줏거리인지라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평소 남의 험담이나 이런 것들을 딱 질색하시는 비지 형님도 이 정도면 많이 힘드신가 보다.
학원 도착. 개원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의 실내다. 조명은 살짝 어둑 칙칙했지만 뭐 내 알바는 아니니...
합주실에는 H형님이 미리 연습 중이었다.
드럼 치는 H형님은 나를 비롯한 다른 동료 뮤지션들과 여러 행사를 다닌 인연이다. 또 우리 학원에서도 수업을 도와주시는 형님이다. 두 학원이 서로 다른 동네에 있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학원생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대부분 입시생인 듯한데, 몇몇 아이들은 한데 모여 과자랑 이것저것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또 몇몇은 컴퓨터로 무언가 보고 있었는데, 영화 보는 중인가...?
그리 어려운 곡들은 아니라서, 또 복잡하게 편곡할 것도 없어서 합주는 신속하게 마칠 수 있었다.
주최 측에서 또 곡을 바꿔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악기를 케이스에 넣었다.
이 행사 저 행사를 뛰다 보면 참 별일들이 다 있다.
다섯 곡 하기로 했는데 행사 당일 돼서야 다섯 곡을 더 해달라고 하지를 않나...
행사 당일 날 레퍼토리를 바꿔달라 하지를 않나...
행사장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어 당황스러워 책임자에게 전화하니 그제야 행사 취소 됐다고 하지를 않나...
행사 끝나고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행사비 입금을 미루질 않나...
무대 마치고 행사비 좀 깎자고 그러질 않나...
합주를 마치고 형님들과 내일 행사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자꾸 뭐가 계속 거슬렸다.
과자를 먹던 아이들은 여전히 과자 파티 중이고, 영화를 보던 아이들은 여전히 영화 평론가 모드이고, 몇몇 아이들이 과자 파티 대열에 합류한 거 같은데... 어랏? 술병인가?
내 알바 아닌 거 같지만, '키보드'는 학생들에게 놀이터를 제공하려고 학원을 차린 건가?
나: 형님, 여긴 원래 매일 이런가요? 과자 파티에... 학생들이 술판 벌이고, 영화나 보고 앉아있고. 피아노 소리, 발성 소리, 기타 소리, 드럼 소리 같은 건 하나도 안 들리고...
비지 형님: 그렇잖아도 아까 뭐라고 했어. 여기서 술 마시면 안 된다고. 몇몇은 여기 다니는 애들이 아니고 그냥 친구들이라네. 쟤들도 정리 중이네.
나: 그 인간은 뭐라 안 하나요? 그나저나 왜 안 보이죠?
비지 형님: 뭐라 안 하니까 저 모양이겠지. 요샌 밤에만 잠깐 나오네. 나도 거의 포기했다.
나: 저 학생들 부모는 이런 상황을 아는 건가요?
비지 형님: 아이한테 관심 없는 부모가 많은 거 같아. 어느 부모는 그냥 수강료만 내고, 상담을 해도 귀찮아하고 관심도 없고 말이야. 어떤 아이는 수강료가 계속 밀려있고. 근데 걔는 ('키보드') 누가 수강료를 언제 결제했는지, 밀려있는지 이런 게 파악이 안 되니까...
나: 이건 뭐, 거의 범죄급이네요. 정말 답이 없네요.
비지 형님: 나도 생각이 많다.
다음날 행사는 보통 그렇듯, 별 탈 없이 잘 끝났다.
중요한 윗 분들이 매우 흡족해하시며 팁이라고 하얀 봉투를 따로 주셨다. 그 안에는 제법 두둑한 액수의 현금이 들어있었다.
이런 거 참 좋다.
팁을 받은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행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데에 있어 이바지를 했다는 게 보람 있고 뿌듯하다.
역시 윗 분들이 기뻐야 모두가 기쁘다.
(통화 중)
비지 형님: 왜, 거 있잖아. 단골손님 중 오원장이라고. 우리 동네에서 병원 한다는... 자기 모임에서 행사 하나가 있는데 거기 연주 좀 해줄 수 있냐고 묻네? 같이 할래?
나: 오, 저도 그분 알죠. 젠틀하고 좋으신데. 저야 당연히 콜이죠!
비지 형님: 그래. 그럼 그리 알고 있을게. 그리고 말이야...
나: 네, 형님?
비지 형님: 나, 학원 정리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