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는 충청북도 정도 면적에 캐나다에서 가장 작은 주 다.
빨강머리 앤의 배경인 이곳은 실제 빨강머리 앤 집이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을 가려고 핼리팩스에서 한 참 떨어진 곳 어딘가의 선착장에서 페리에 탑승했다. 이렇게 큰 배는 처음이었다. 차를 배에 태우고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배 안의 주차장은 넓었고 적어도 수십대 이상이 이미 주차되어 있었다.
배가 워낙 커서 그런지 그냥 차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배 맨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막상 내려다보니 엄청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다.
그렇게 배 아래를 보면서 최선을 다해 멍 때리던 중 D형이 부른다.
"야! 우리 내려야 해. 빨리 와!"
아니 벌써? 배 탄지 한 시간도 안 된 거 같은데...
그렇다. 배로 3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섬이었다.
차에서 바깥 풍경을 본다.
달리는 밴의 유리창을 캔버스 삼아 밖을 바라본다.
창문 맨 위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색의 정석을 보여주는 하늘이 보인다.
바로 아래 짙은 남색의 바다가 보인다.
그 밑에 평평하지 않은, 그렇다고 언덕도 아닌 푸른 잔디 위 넓은 꽃밭이 보인다. 땅에다가 거대한 팝콘을 뿌려 놓은 듯했다.
팝콘꽃이 아니라 감자꽃이었다.
실제로 PEI는 감자로 유명한 곳이다.
토론토에서 시작해서 노바스코샤 직전까지 지겨우리만큼 봤던 나무, 잔디, 언덕, 숲의 풍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로 어느 정도 달린 후 도착한 곳은 드넓은 잔비 들판이 펼쳐진, 가까운 곳 바다가 보이는 캠핑장이었다. 잔디밭 끝으로 해변가였고 아주 드물게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난 며칠간 지냈던 캠핑장을 떠올리면서 생각 드는 게, 캠핑장이 딱히 경계선이 없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엄연하게 구분이 되어있지만 체감상 그냥 여기저기 빈 공간에 마구잡이로 텐트가 쳐져있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머물 캠핑 사이트만 예약해놓고 다시 밴에 올라탔다.
빨강머리 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이제는 익숙해진 그림 같은 풍경들을 더 즐겨보았다. (본다기보다는 멍하니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표현일 듯하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예쁜 집 한 채가 보였다. 주변 풍경과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녹색 지붕과 흰색 벽의 조합이 잘 이루어진 집이었다.
이 섬에 들어와서 느꼈던 점은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웠던 것인데 앤 집에 오니 관광객들이 제법 많았다.
나는 막상 빨강머리 앤을 만화나 짤막한 이야기들로만 접해봤기 때문에 큰 감동 같은 건 받지 못했다. 그냥 평화롭고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 분위기에 매료 돼 있었다.
캠핑장에 돌아와 세팅을 마친 뒤 D형과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왜 수영복을 챙겨 오라 했더니만 바다에 몸을 담글 수 도 있다고 해서였다.
거의 흰색에 가까운 모래에 그 어떤 남색 보다 진한 빛의 바다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진짜 제대로 된 해수욕장 겸 바다를 처음 접해봤다.
아주 어릴 때 강릉 주문진에 가보긴 했다. 일정 내내 흐리거나 비가 왔고 낚싯배에 탔던 기억이 있지만 해수욕장에 간 기억은 없다.
발을 먼저 물에 담가 본다. 그렇게 차지 않았다. 한 발짝 씩 더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물은 내 옆구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D형과 함께 물에서 수영은 아니고, 그냥 허우적거리면서 놀았다. 누가 더 숨을 오래 참나 잠수도 하고 물장구도 치고 간간히 손에 잡히는 미역 무더기를 머리에 올리며 긴 곱슬머리의 소녀(?) 변신 놀이도 했다.
한국에서도 티브이 뉴스에서만 보던 해수욕장은 휴가철이면 물 반, 사람반이 되던 경포대, 해운대 밖에 떠오르 질 않았다. 그때도 느낀 건 휴가를 굳이 저렇게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곳에 가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내가 굉장히 특별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이 이름 모를 해수욕장에 나를 포함해서 주변에 스무 명도 되질 않았으니 진정한 휴가를 즐기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놀고 저녁을 먹으러 캠핑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D형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에 가득했던 여드름이 온 데 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였다. 형네 어머니가 텐트에 후다닥 가셔서 거울을 가져오셔서 형에게 보여줬다. 형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해맑게 웃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추측건대, 아마 바다 수영을 오래 해서, 바닷물 때문일 거라고 했다. 이 말을 듣던 형은 빈 생수통을 들고 바다 쪽으로 갔다. 진짜로 얼마 후 생수통 몇 개를 바닷물로 채워 왔다.
"토론토 가면 아침마다 이 물로 세수해야겠어!"
다들 빵 터졌다.
그러나 이 바닷물을 무한공급으로 계속 쓸 수는 없기에 형은 결국 바닷물을 포기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페리를 타고 이제 다시 육지로 돌아갈 시간, 나는 또 내 주특기인 멍 때리기를 PEI 해변가를 보며 마무리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여정에 오면서 들렀던 캠핑장 또 머무르기도 했다. 확실히 처음 왔을 때랑 느낌이 달랐다. 뭔가 더 많이 친숙한 느낌이었다.
토론토 출발부터 노바스코샤와 PEI까지는 날씨가 계속 좋았으나 돌아오는 길은 영 별로였다. 대부분 비, 아님 흐림이었다.
피로가 쌓였는지 차에서는 거의 잠만 잤다.
집에 도착. D형과는 성당에서 보기로 하고, 아쉬운 채로 헤어졌다.
방에 누웠다.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을 했다.
'내가 거기를 다시 갈 수 있을까? 다시 꼭 가고 싶은데...'
30년이 지나도록 노바스코샤와 PEI는 아직도 못 가고 있다.
그래도 다시 꼭 갈 거다. 그게 언제가 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