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비밀 (1)

by 이삼오

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 시작, 한국 같았으면 국민학교 최고참인 6학년이지만 이곳에서는 8학년이 최고참인지라 큰 의미가 없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5학년 때는 본 건물에 교실이 있었지만 이번엔 별관에(간이 교실이라고 보는 게 더 맞다) 반배정을 받았다.



5학년 때 같은 반 애들이 다수여서 익숙한 분위기였다. 작년 학기 시작 때 와 마찬가지로 다들 여름에 뭐 했는지 서로 안부 주고받기 바빴다. 입이 잠시라도 쉴 틈이 없다.



더욱이 신기한 건, 내가 어지간한 걸 다 알아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 이번 방학 때 할머니가 계신 아르헨티나에 갔다 왔어. 제법 추웠지만 우리 겨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는 원래 쿠바에 갔다 오려고 했는데 아빠가 오토바이 사고가 나는 바람에 겨울로 미뤄졌어. 다행인 건 아빠가 크게 안 다쳤다는 거야. 어차피 쿠바는 여기가 추울 때 가는 게 훨씬 나을 거야."


"나는 그냥 이번 여름에 도서관에서 책만 빌려 읽었어. 엄마가 독후감 하나에 5달러씩 준다고 해서... 잔머리 쓰거나 할 수도 없어. 우리 엄마가 영어(국어) 선생님이거든."




"넌, 뭐 했어?"



.....



"(한 대 툭... 아니, 퍽하고 치면서) 야! 너 뭐 했냐고? 내 말 안 들려?"



"왓? 미?"



"그래! 너. 사람 말 좀 들어라 진짜..."



작년과 올 해도 같은 반인 M이다. 폴란드 혈통으로 짧은 금발 단발머리에, 청록색 눈동자에 백지장 같은 피부, 인형의 외모를 가진 여자 아이지만 마동석도 단번에 흐뭇하게 만들 터프함을 자랑한다.



"아이 웬투 노바스코샤 앤 피이아이. 잇 워즈 어메이징!"



그렇다. 아직은 ESL을 못 벗어나고 있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다 된다.



기쁨, 슬픔, 분노, 동정, 상심, 질투, 시기 등 어지간한 건 다 표현이 가능했다.



다만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어느 만화나 영화의 누가 어째서 뭘 했는지와 어느 게임에서의 마지막 보스를 깨부수는 법 따위의 설명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다.




교실에 앉아 둘러보니 아예 새로운 얼굴 둘이 보였다. 두 명 다 여학생. 한 명은 동양인이긴 한데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아닌 거 같았고, 또 다른 한 명은 서양인이긴 한데 전혀 말이 없이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동양 아이는 필리핀에서 온 샤민이라는 친구였다. 영어가 그다지 능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같은 반에도 필리핀 친구들이 더러 있고 이미 친해진 거 같았다.



서양인 친구, 짙은 갈색 머리와 밝은 갈색 눈을 가지고 있는 이 친구의 이름은 모니카였다. 보아하니 영어는 아예 못 하는 것 같았다. 왠지 예감에 유럽 어디선가 온 듯한데 상당히 궁금했다. 단순히 외모와 이름만으로 어느 곳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ESL시간, 샤민과 모니카도 함께 했다. 선생님이 소개를 해주셨다.



샤민은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자기소개도 직접 했다.



모니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떨구고 있었고 엄청나게 강렬한 눈 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레이저가 나올 것만 같았다. 눈이 안 마주치려 했건만...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재빨리 딴 곳으로 피했다.



선생님은 학년과 이름, 나이만 짤막히 알려주고 앞으로 잘 지내라고 하셨다.



'아... 궁금해. 어디서 왔냐고...'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나 싶지만 답변을 못 받으면 어쩌나 하는 나의 소심함과 너무 카리스마 있는 표정을 계속하고 있어서 선뜻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샤민은 붙임성도 좋고 쾌활한 성격에 금방 친구들을 사귀었다. 말로 소통이 힘들어도 미소로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는 듯했다.



반면 모니카의 목소리는 아직 들어 보질 못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쉬는 시간에 멀찌감치 몇몇 아이와 잠깐 얘기하는 거 같더니 금세 혼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시간은 어느 정도 흘러 샤민은 이제 반에서 인기녀로 자리를 잡았고 모니카는 여전히 말 없는 강렬한 카리스마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드리면 다 죽는다'의 표정의 모니카는 얼굴에 무장해제를 하기 시작했다.



얼굴의 근육은 살짝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주 짧게 웃기도 하였다. 목소리는 제법 어린 여자 아이치고 상당한 중저음이었다.



단순한 영어 단어 몇 개를 짜집기 한, 알아듣기 힘든 문장 몇 가지를 주로 반복하는 듯했다. 당당하게 자기네 언어로도 뭐라 뭐라 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보아하니 모니카와 같은 나라 출신인 아이들이 다른 학년에 두 어명 정도 더 있는 듯했다. 이 들은 서로 알고 지내는 듯 하나 친해 보이지는 않았다.




ESL시간, 파트너와 작성을 해야 하는 이야기 쓰기 과제가 있었다. 제비 뽑기로 짝을 정하는 거였는데 나와 모니카가 짝이 됐다.



흠, 조금 난감했다. 인사 정도만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내 영어 능력이 조금 더 나으니 내가 주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 걸? 매우 반짝이는 눈으로 손 짓 발 짓 해가며 최대한 적극적으로 소통하려고 했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작업이 진행 됐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압도적인 페이스로 앞서 있었다.



'기회는 지금이다!'



"웨어 알 유 프롬?" (그렇다. 또 나왔다)



"... 유고슬라비아."



"아....."



발칸 반도에 위치한.. 축구를 제법 잘하는.. 정치적, 역사적으로 여러모로 복잡한 나라여서 항상 나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그런데, 여기 지금 전쟁 중이지 않나?



그렇다. 모니카는 캐나다에 난민으로 온 거였다. 이 시기쯤 유고슬라비아 쪽에서 난민이 대거 들어왔다는 뉴스를 본 거 같았다.



모니카의 가족은 원래 헝가리 출신인데 유고슬라비아로 이주해서 지내고 있던 중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모니카의 얼굴에는 불안과 공포가 얼굴에 깊이 박혀있는 듯했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은, 굳이 본인 삶에서 목격해야 할 필요 없었던 것들을 애써 쥐어 짜내려 하던 게 아니었을까.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삶과 사연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새바람'은 그냥 진짜 애들 장난의 손톱의 때 만도 못한 거였다.






샤민의 패션 트레이드 마크는, 마른 체형이지만 항상 자기 사이즈보다 훨씬 큰 윗도리다. 소매는 항상 길게 축 늘어져 있어서 손이 안 보였다.



옷이 왜 대수냐고? 간혹 아주 더운 날에도 변함없이 긴 팔 옷을 입고 다녔다. 어린 나이에 본인 패션 성향이 뚜렷한 건가...



항상 밝아 보이는 샤민도 표정이 싹 가라앉을 때가 종종 있었다.



바로 체육이 있는 날이다.



샤민은 체육시간에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만 되면 몸이 안 좋아지는 건지 아니면 체육을 극도로 싫어하는 건지, 체육시간에는 교무실 어딘가에서 따로 과제를 하곤 했다.



선생님에게 체육시간 때마다 굳이 따로 얘기를 안 하는 걸 보아하니 무언가 숨겨진 이유가 있는 거 같은데...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 도 없고 물어본다고 해도 알려주시지 않을 거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모두가 교실로 돌아왔을 때, 샤민은 그제서야 원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도 샤민의 체육시간 땡땡이에 대해서 아는지, 궁금한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니 별 생각 없이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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