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날이 제법 추워졌고 작년 겨울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눈은 펑펑 쏟아졌다.
샤민과 몇몇 필리핀 친구들은 눈 오는 걸 처음 본다고 했다.
처음엔 봐도 봐도 신기한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서 눈을 먹어보기도 하며 손바닥을 펼쳐 떨어진 눈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추위는 다들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라 얼굴 표정은 빗물에 젖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아지 같았다.
샤민이 물어본다.
"한국에도 눈이 와?"
"예스 옵코울스! 이츠 베리 콜드 인 읜털."
"아! 필리핀에서도 눈을 본 적이 있어."
"잉? 하우?"
"냉동고를 열면 눈이 좀 쌓여있잖아. 헤헤."
모니카는 아무리 추운 날이어도 표정에 변화가 없다.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하긴, 이깟 추위가 무슨 대수일까...
눈은 이제 제법 쌓여서 학교 전경은 하얀 솜이불을 덮어 놓은 듯 보였다.
그럼 당연히 이쯤 되면 하는 놀이, 스노우 잡. 누가 눈에 묻힐 것인가...
저 멀리 남자 애 둘이 모니카에게 접근하는 게 보였다.
'흠, 만만치 않을 텐데...'
모니카가 자기를 자빠트리려는 애들 둘을 가볍게 저지한다. 무술 같은 걸 배웠는지 남자 애들 둘이 추풍낙엽 마냥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장난으로 친해져 보려는 아이들은 발칸 반도의 매운맛을 제대로 경험하고 씁쓸하게 돌아섰다.
역시, 강하다. 모니카는 이제 앞으로 눈에 파묻힐 가능성은 제로다.
시간은 흘러 모니카도 이제 제법 말문이 트였고 우리는 좀 더 친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지리에 관심이 많은지라 유고슬라비아에 관하여 항상 물어봤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은 곳이라고... 사람들, 날씨, 친구 그 모든 게 항상 그립다고 했다.
비록 자기는 전쟁에서 벗어났지만 친구들이 걱정된다고 했다. 실제로 파편을 맞아 다친 아이들이 꽤 많다고 했다.
나에게도 한국에 대해 많이 물어봤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 많이 물어봤는데... 뭐 딱히 답을 해줄 수 없는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심시간, 밖에서 한 참 풋하키를 하다가 잠깐 쉬는 중, 모니카가 보인다. 옆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모니카는 갑자기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학교 건물 뒤편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리고... 아니 끌고 왔다.
나를 벽 쪽으로 밀치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눈을 뚫어져라 본다.
살짝 쫄았다. 내가 뭐 실수했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나에게 한 발짝 더 성큼 다가온다. 눈빛이 묘하다. 얼굴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깐, 얘가 나 좋아하나? 그래도... 야... 난 아직 준비가..."
혼자 머릿속에서 열심히 꼴값을 떨던 중 모니카는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갑자기 자기 윗도리를 자기 가슴팍 바로 아래까지 올리더니 배를 내보였다.
그걸 본 순간 나는 그냥 자리에 얼어붙었다.
여태껏 이런 몸은 본 적이 없었다. 어디 성한 곳이 없는 상처 투성이었다. 화상 자국도 있는 듯하고, 수술 자국, 찢긴 자국, 그 외에 알 수 없는 온갖 흉터들...
파편 때문에 다친 곳도 있고, 불 때 문에 화상 입은데도 있고, 몸 여기저기가 상처 투성이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얼굴을 안 다친 거란다.
그날 집에 가서 오늘 봤던 장면이 가시질 않는다. 모니카의 배는 전쟁의 끔찍함을 날 것으로 그대로 보여주는, 마치 한 폭의 공포스러운 그림을 본 것 같았다.
나를 이제 자신의 친한 친구라고 생각을 한 것일까. 자신의 고통스러웠고 답답했던 과거를 털어놓고 싶었던 게 아닐까.
왠지 모르게 모니카는 점점 더 밝아지는 거 같았다. 아이들이 장난을 걸어와도 잘 받아주고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와서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야, 너 그거 알아? 샤민 있잖아... 걔 손가락이..."
그때 샤민이 우리 둘 뒤를 쓱 하고 지나간다. 죄지은 것도 아닌 친구는 화들짝 놀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샤민과 눈이 마주쳤는데 약간은 슬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ESL시간, 샤민 옆자리에 앉았다. 일반 교실처럼 책상과 의자가 나란히 놓인 형태가 아니었다. 원탁도 있고, 네모난 테이블도 있고, 두꺼운 카펫 바닥도 있었고, 교실보다는 놀이방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빈 공간에 앉는 식이었다.
한 참 무엇을 쓰고 있다가 무심코 샤민의 손을 보게 됐다.
어? 그런데 오른손을 테이블에 올려놨네? 얘는 왼손 잡이고 오른손은 항상 책상아래 축 늘어뜨렸던 거 같은데... (정말 쓰잘데 없는 관찰력 하나는 최고다)
그런데... 오른손이 왠지 모르게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생긴 듯했다.
크헉! 엄지 손가락이 두 개다!
원래 있는 엄지 옆에 엄지 하나가 더 붙어있었다. 약간 새총, Y자 모양과 흡사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보게 됐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샤민도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자, 됐지? 이제 궁금한 거 없지?"
상냥하지만 강하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체육을 안 했는지, 왜 항상 긴 옷만 입고 다녔는지.
샤민은 원래 오른손잡이란다. 엄청난 노력으로 왼손으로 뭐든 할 수 있단다. 본의 아니 게 후천적 양손 잡이었다.
언젠가부터 샤민도 일부러 오른손을 숨기지 않았다. 체육도 정상적으로 참여했다. 모두가 알게 되었고 놀리는 애들도 없었다. 오히려 신기하다며 한 번 만져봐도 되냐는 애들도 있었다.
나도, 만져봤다. 그냥 손가락이다.
모니카는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쳤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간호사가 될 거라고 했다.
도서관에서 본 게 마지막으로 그 이후엔 마주치질 않았다.
샤민은 졸업 후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한 다리 건너서 들은 소식은 일찍 결혼해서 두 아이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들었다.
강하고 씩씩한 그대들이여, 잘 살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