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 #1
난 은행을 좋아하진 않는다. 잎의 모양으로 따지면 은행잎보다는 단풍잎이 좋고, 은행에게서 나는 냄새는... 다른 냄새로 가리기에 급급하다. 은행은 무려, '신생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그 탓에 천적이 없다고. 나처럼 은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끔찍한 소리가 또 없을 것이다.
이런 내가, 조금 은행나무를 다르게 본 일이 생겼다.
혹시 파페포포 시리즈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태어나기 전 웹툰이라는데, 나는 처음에 만화책인 줄 알았다. 학교 도서관 한 구석에는 파페포포 시리즈가 있었다. 정확히 어떤 책에서의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은행나무 고백법이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 등장한다.
(찾아보니 파페포포 안단테 편, 21 '은행나무 사랑'이다. 관심 있으면 찾아보시길.)
책에 남자 캐릭터(파페)가 여자 캐릭터에게(포포) 은행나무는 숫나무와 암나무가 있고, 둘은 곁에 있는 나무와 결혼(수정)을 해,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이러면서 둘이 고백에 가까운 말들을 내뱉는데, 이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진 못 하지만 나에게는 흐릿하게 남아있다.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그 고백이든, 은행나무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상생활에서 이를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굳이 언급할 일도 없었고, 이런 말을 내 주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듣는 성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건 나 혼자만의 몽상 같은 거였다.
다시 한번, 은행나무를 작품에서 만난 건 교과서에서였다. 교과서에는 함민복 시인의 '독은 아름답다'가 실려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이 작품(단원)을 배우며 역설과 반어를 공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독은 아름답다는 아마 역설 부분이었을 것이다. 시에는 은행나무에 대해서 '은행나무 열매에서 구린내가 난다 / 주의해 주세요 구린내가 향기롭다'-라고 적혀있다. 이때 선생님께서 은행나무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도 되살아난 건지 내가 말했다.
"은행나무도 결혼한대요!"
그때의 반 분위기가 어땠을 것 같은가? 당연히, 난리가 났었다. 은행나무가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결혼을 하냐는 말부터, 너무 영화/드라마를 많이 본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내가 너무 진지하게 "진짜라니까."라고 말해서 반은 더 난리가 났었다. 지금도 그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날 보면 종종 "은행나무도 결혼한다면서?"라거나, "은행나무도 결혼한대요."라며 놀리고는 한다.
이후 난 그 말을 듣게 되면, "응. 은행나무는 결혼해서 100년 해로 잘 산대."라고 답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이 아닌, 수정이란 단어를 썼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말하고 알려주는 걸 좋아하는 애가 대뜸 은행나무도 결혼한다는 소리를 하니, 애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도 하고 놀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선생님께서도 "선생님도 그건 처음 듣는 소린데, 한번 찾아볼게."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억울함은... 그렇게 다음 국어 시간이 되어서 비로소 풀렸다. 선생님께서, "은행나무는 결혼한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새롭게 ppt에 적을 내용이 생겼다며 내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당연하게도 애들은 교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일명 '은행나무가 결혼한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한동안 우리 반 유행어는 "은행나무가 결혼한대요!"였다. 거의 인사말 수준으로 내게 그렇게 외치고 다녔다.
은행나무도 결혼한다.
다만, 그 결혼을 '수정'이라 표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