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km를 건너가는 선한 거짓말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32

by 글빛누리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31

어머니와의 통화는 언제나 익숙한 원을 그리며 흐른다. 예고된 순서대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찾아오는 물음들. 수화기 너머의 시간은 언제나 정해진 리듬을 타고 내게 당도한다.

"거기 날씨는 좀 어떠니?" "집이 춥지는 않고?" "눈이라도 오면 길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한다." "점심은 무얼 먹었니, 저녁은 또 언제 먹을 게야."

지극한 안부와 촘촘한 걱정들. 그 무게가 때로 버거워질 때면 나는 철없는 아이처럼 짓궂은 농담을 던지곤 했다. "어머니, 내가 차라리 좀 아팠으면 좋겠죠? 그래야 걱정할 맛이 나시려나. 흐흐."


처음엔 그 정해진 리듬을 견뎌내는 일이 고역이었다. 매일 특별할 것 없는 식단표를 기억해내야 했고, 무심코 뱉은 작은 기침 소리 하나에도 수만 가지 대처법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사랑의 밀도가 너무 높아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주 성실한 답변자가 되기로 했다. 아흔넷, 어머니의 생을 지탱하는 관심이 자식의 하루 말고 또 무엇이 남았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릿해온다. 그럼에도 가끔, 반복되는 일상이 건조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작고 예쁜 사건들을 조심스레 지어내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들으면 안심하고 기뻐할 만한 풍경들만 골라 담는다. 반가운 친구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 이야기, 갓 지은 밥 위에 올린 따뜻한 반찬들, 주말의 공기를 마시며 산책했던 기억들. 그리고 오늘은 조금 특별한 블로그 기획을 하며 마음을 채웠다는 근황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문득 깨닫는다. 내가 지어낸 나의 하루가, 실제 나의 남루한 하루보다 조금 더 단정하고 정갈해져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이 잠시 민망해져 나는 더욱 정성껏 단어를 고른다. 다채롭고 건강하게, 생기 넘치는 언어들로 어머니의 하루에 작은 파동을 만드는 '선한 거짓말'을 쌓아 올린다.


내가 성실히 거짓을 짓는 동안, 생각은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변화 없는 내 삶도 참 더디게 흐르고 있구나. 하지만 어머니를 위해 정성껏 일상을 가공하는 이 시간이, 어쩌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한국과 독일을 잇는 8,000km의 거리. 나는 오늘도 시차를 가로질러 그 먼 길을 건너간다. 오직 목소리라는 가느다란 실 하나에 의지한 채.

통화가 끝나면 어머니는 안심하고, 나는 안도한다. 8,000km 너머에서 여전히 나를 궁금해하는 그 목소리가, 역설적이게도 내가 오늘을 무사히 살아냈다는 유일한 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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