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하이델베르크에서의 죽음>
제16화 마지막 쪽지

by 글빛누리

하이델베르크 어학원 마지막 주, 소영은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작은 노트를 꺼냈다.

처음 독일에 도착했을 때 기차 안에서 썼던 미완의 글이 있었다.그 글은, 이혼을 앞둔 한 여자가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다른 플랫폼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였다.

소영은 그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그 아래에 이름도, 설명도 없이 기훈을 닮은 인물을 등장시켰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담배 냄새가 옷깃에 남아 있었고, 조용히 삶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작별한 사람이었다.

소영은 그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렵고, 손끝이 떨렸지만 쓰면 쓸수록 그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그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밤,
소영은 오래된 성벽 아래 벤치에 앉아 작은 노트 한 장을 찢어 바람에 띄워 보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끝까지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우연히 이해받아버린 사람들과의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소영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차표를 취소했고, 아이들에게는 조금 더 이곳에 머물겠다고만 말했다.

그리고 다시 네카강으로 향했다. 이번엔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강변에 자신의 걸음을 조심스럽게 포개며 걸었다.

물결은 오늘도 어스름했다. 바람이 지나갔고, 그 바람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소영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에요.”


에필로그 2: 기훈의 마지막 쪽지

며칠이 지나고, 어학원 직원이 소영을 찾아왔다.

“혹시… 이거, 소영 씨 건지 모르겠는데요.
기훈 씨 방 정리하다가 책상 안에서 발견했어요. 다른 이름은 없고, 그냥 ‘홍’이라고만 쓰여 있어서…”

그녀는 무언으로 봉투를 건넸다.

작고 낡은 흰 봉투.

앞면엔 삐뚤하지만 단정한 글씨로,

딱 한 글자.

소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한 장의 종이.
딱 반으로 접혀 있었다.그 안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내 삶의 가장 깊은 밤에
당신이라는 창을 열어두었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소영은 무너졌다.

울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손끝이 천천히 떨렸다.

그 문장은 어떤 고백도, 부탁도, 사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자신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 빛으로 삼았다는 증거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 밤,
소영은 책상 앞에 앉아 처음으로
그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무대에서조차 자신을 감추던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창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그 문장을 받은 이상,
그는 그녀 안에서 끝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소영은 처음 문장을 써내려갔다.

“나는 지금,
그 사람이 내 안에 남겨둔 밤의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있다.
그 창을 통해 나는,
아직 다 쓰지 못한 그의 삶을 바라본다…”

기훈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남았다.

소영은 다시 글을 썼다.
자신의 이야기와
그의 이야기,
그리고 이름 없는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

하이델베르크의 강은 여전히 흐르고,
언덕은 계절을 바꾸었고,
밤은 더 길어졌다.

그러나 그녀에겐
이제
다시 써야 할 삶이 남아 있었다. <끝>


� 이 글은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죽음》 시리즈의 마지막 회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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