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7화
퇴근길,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저녁 무렵 뚝 멈췄다.
갑자기 열린 하늘 아래, 나는 집으로 가는 길 대신 낯선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며 물들었다..
네온사인, 가로등, 편의점 형광등까지,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검은 거울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엔 스쳐 지나쳤을 풍경들이,
오늘은 유독 낯설고도 아름다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웅덩이를 피해 걷다가도, 때로는 일부러 첨벙.
어릴 적 장화 신고 빗속을 뛰놀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재래시장을 지나며 문 닫는 가게들을 스쳤다.
늦은 퇴근에도 상인들의 얼굴에는 피로보다 안도감이 어려 있다.
작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 그에 맞춘 콧노래, 하루를 정리하는 대화들.
그 모든 소리가 시장의 밤을 포근하게 감쌌다.
문득 허기가 밀려온다.
포장마차의 불빛 아래 자리를 잡았다.
비에 젖은 천막 너머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
그 안에서는 라면 끓는 소리와 소주잔 부딪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혼자세요? 여기 안쪽으로 들어와요.”
주인 할머니의 인사에 미소로 답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탕 한 그릇,
따뜻한 국물 한 입에 하루의 고단함이 녹아내린다.
간단한 요기로 다시 길을 나섰다.
도시는 여전히 젖어 있고,
달빛은 구름 사이로 스며들어
현실과 환영의 경계가 흐릿하다.
골목길 사이,
작은 서점, 오래된 공방, 숨어 있던 카페들이 눈에 스친다.
바쁘게 지나칠 땐 몰랐던 풍경들.
이제야 마주하는 새로운 감각들.
책장이 보이고 노란 조명이 비치는 어느 카페 앞에 섰다가
그저 지나치기로 했다.
오늘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언젠가 다시 찾아올 수 있으니까.
익숙한 동네, 익숙한 골목.
집으로 향하는 길, 습관처럼 걸어왔던 그 길이 오늘따라 새롭게 느껴진다.
비에 씻긴 도시가 건넨 조용한 마법.
현관 앞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멀리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더는 서두르지 않는다.
우연히 떠난 이 산책은
내게 오늘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해줄
충분한 선물이었으니까.
비 그친 도시의 밤. 아스팔트 위에 반사된 불빛들은 내일이면 사라지겠지만,
그 순간의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