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8화
-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7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거리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아스팔트 아래 묻힌 기억들, 건물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들,
그리고 공기 속에 맴도는 과거의 숨결.
오늘 나는 그 시간의 겹을 거슬러 올라가,
1930년대 경성의 거리를 걷고자 합니다.
전차가 달리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오가던 그 시절.
전통과 근대가 어색하게 만나 충돌하고 공존하던 그 순간.
그 찰나의 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종로는 경성의 심장이자 근대의 동맥.
금속 바퀴가 깔린 철로 위로 전차가 삐걱이며 달려가고,
양복 차림의 남자들과 단발머리 여성들이 분주하게 거리를 오간다.
“딸랑 딸랑—”
전차 안내원의 손에 쥐어진 종이 울리며 전차가 멈춘다.
“종로 3가, 종로 3가입니다!”
거리에는 한글과 일본어, 영어가 뒤섞인 간판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고,
미쓰코시 백화점 앞엔 서양식 모자를 쓴 여성이 쇼윈도를 바라보며 멈춰 서 있다.
그 옆에선 한복을 입은 노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큰 건물을 올려다 본다.
이 거리의 풍경 속엔 변화의 물결과 정체성의 소용돌이가 공존한다.
나는 그 틈에서,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묻는다.
이 소리, 이 얼굴들, 이 공기 — 이게 바로 ‘근대’였을까?
1930년대의 다방은 단순한 찻집이 아니다.
문학이 태어나고, 사상이 오가며, 연애가 피어나던 공간.
나는 ‘은좌’라 불리던 다방 구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실내는 담배 연기로 희뿌옇고, 라디오에서 재즈가 흐른다.
이상(李箱)이 시를 읊조리고, 박태원이 펜을 놀리는 듯한 상상 속에서,
청년들은 조용히 신문을 넘기며 커피 한 모금에 생각을 띄운다.
“선생님, 설탕 넣은 커피 한 잔이요.”
그 한마디조차 문학처럼 들리던 시절.
창밖으로 스쳐 가는 모던보이, 모던걸의 옷차림에는
근대를 살아내는 새로운 감각이 묻어난다.
다방 - 그들만의 작은 ‘근대’.
우리 모두의 불완전했던 첫 세계.
종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면, 시간은 다시 흔들린다.
낮은 기와지붕 아래 고즈넉한 한옥이 숨 쉬고,
그 사이 붉은 벽돌의 양루洋樓*가 고개를 내민다.
[*洋樓'는서양식 건물. 이는 단순히 외관과 구조를 넘어, 새로운 생활방식, 사상, 그리고 경제적 흐름을 수반했습니다. 이러한 건물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며, 특히 근대 여성인 '모던걸'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기능했습니다.]
남산 자락의 골목, 북촌의 대문가, 창경원 근처의 담장 아래…
서구식 창틀과 한지문이 나란히 자리한 이곳에선
서로 다른 문화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여보게, 그 양복이 참 멋지군.”
“자네 치마저고리도 풍겨오는 멋이 있네.”
마치 문화 간 대화처럼,
이 충돌과 혼재는 경성의 ‘진짜 얼굴’이다.
광장시장**과 남대문시장.
1930년대에도 이곳은 뜨겁게 살아 있다.
“싱싱한 조기요, 방금 들어온 조기!”
“양복 천 사세요! 일본산 최고급이오!”
매일의 피곤이 쌓여도 우렁찬 생명력은 꺼지지 않는다.
떡볶이 냄새, 젓갈의 향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민요,
그리고 아이의 웃음소리.
이곳은 어쩌면 다방보다 더 진짜 ‘경성’일지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이 흐르던 곳,
누구나 존재의 무게를 숨김없이 드러내던 공간.
[광장시장**은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대표적인 재래시장 중 하나로, 1905년에 개설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장소입니다. 광장시장은 경성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로, 1930년대 서울의 변화하는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방문하여 생필품을 구매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장은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교류의 장으로 기능했다.]
해가 지고,
가스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면 경성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종로의 밤거리를 걷다 보면
카페 창문 안으로 흘러나오는 불빛과 재즈 선율이
젖은 거리를 비춘다.
그 빛 아래,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내일을 꿈꾸며 걸어간다.
구보 씨처럼 혼자 걷는 이들의 뒷모습이 유난히 선명한 밤.
그들의 고독은 슬픔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낸 자의 짙은 자의식.
1930년대 경성은, 단지 과거의 도시가 아니다.
그것은 ‘변화의 감각’이 몸을 입고 걷던 시간이며,
지금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풍경이다.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한옥의 처마 끝, 오래된 간판의 흠집,
종로 다방의 커피 향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강을 건넌다.
그 거리를 걷는다는 것—
스스로의 ‘근대’를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1930년대의 경성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조용히 균형을 찾아가고 있으니까.
이 글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문학적 산책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1930년대 #경성 #근대의산책 #시간여행 #전차 #다방 #모던보이 #모던걸 #종로 #서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