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걷기에서 피어나는 관계
"내가 걷기 시작한 건 약 15년 전이었다." 좀머 씨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낯설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악기가 다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건축가였고, 아내와 딸이 있었지."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좀머 씨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 조용하고 고독한 사람에게 한때 웃음소리가 가득한 집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는 바닷가 근처에 살았어. 내가 직접 설계한 집이었지." 좀머 씨의 눈빛이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15년 전 어느 아침을 향하고 있었다. "모든 창문에서 바다가 보이도록 했단다. 딸아이는 바다를 무척 좋아했어. 매일 아침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서, 창가에 서서 바다에게 인사를 했지."
그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나 짧았지만, 소년은 그 미소 속에서 아버지였던 좀머 씨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날도 평범한 아침이었어." 좀머 씨는 숨을 고르더니 계속 이야기했다. "아내는 일찍 출근했고, 나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기로 했어. 하지만 갑자기 중요한 전화가 왔고..."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는 딸에게 혼자 가라고 했지. 그냥 한 번만, 오늘 한 번만 혼자 가보라고."
소년은 좀머 씨의 목소리에서 15년 동안 되풀이되었을 자책감을 느꼈다.
"그날 태풍이 왔어. 예상보다 빨리, 예상보다 강하게." 좀머 씨는 손을 꽉 쥐었다. 너클이 하얗게 드러났다. "딸아이는 학교에 도착하지 못했어. 바닷가 도로가... 파도에 휩쓸렸지. 열 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파도였어."
공원에 흐르던 평화로운 공기가 무거워졌다. 소년은 숨을 멈췄다. 좀머 씨의 두 눈은 먼 과거를 보고 있었고, 그 시선 속에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가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걷기 시작했어." 좀머 씨의 목소리는 이제 더욱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딸을 찾으러 다녔지. 바닷가를, 산을, 온 동네를 뒤졌어.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그다음에는... 그저 걸었어. 걷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으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걷는 동안만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됐어. 몸이 움직이는 동안, 마음은 잠시 쉴 수 있었거든. 발걸음의 리듬이 머릿속의 목소리들을 덮어줬어."
윈터 양은 조용히 좀머 씨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함께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위로였다. 말로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을 손끝의 온기로 달래는 것.
"그렇게 걷다 보니 익숙해졌어. 말은 필요 없었고, 사람들도 필요 없었지.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들이... 너무 아팠거든. 그냥 걷는 것만으로 하루가 지나갔으니까."
소년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좀머 씨가 그렇게 끊임없이 걸었는지, 왜 그렇게 단호하게 세상과 거리를 두었는지.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나 성격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쓰러졌지." 좀머 씨의 목소리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어.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지. 내가 얼마나 나이 들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제 이야기는 또 다른 전환점에 도달했다. 윈터 양이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받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