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1 괴기 산장, 1화 프롤로그/1장 담쟁이집

프롤로그: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 1장: 담쟁이 넝쿨의 집

by 글빛누리



프롤로그: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

기억이란 참 기묘한 것이다. 어릴 때의 것들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는데, 유독 한 곳의 기억만큼은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어제 일처럼.

1950년대 말,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았던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유일한 기록이었던 몇 장의 흑백사진들도 모서리가 닳고 희미해져 있었지만, 그것만이 우리 존재의 증거였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정말 볼품없던 어린 나의 모습. 아버지와 개울에서 고기 잡는 사진 한 장.

우리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가난은 우리 가족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신학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더 깊은 학문을 위해 스위스로 떠났다. 우리 가족을 어느 지인이 사용하지 않던 외딴 이층집에 남겨놓고.

그 집을 우리는 '산장'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유년의 가장 선명하고도 기괴한 기억들이 시작되었다.


1장: 담쟁이 넝쿨의 집

첫 만남

그곳은 공동묘지가 지척에 있는, 앞산 근처의 외딴집이었다. 처음 그 집을 본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층집이었는데, 사방으로 담쟁이 넝쿨이 휘감고 있어 집 전체가 초록빛 베일에 싸인 것 같았다.

집 주변엔 채송화, 맨드라미, 접시꽃, 해바라기, 아카시아 등이 울타리를 대신했다. 어머니는 그 꽃들을 보며 "그래도 여기는 꽃이 많아서 좋구나"라고 말씀하셨지만,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집 주변으로는 광대한 담배밭이 펼쳐져 있었고, 약 150미터 떨어진 곳에 담배밭을 운영하던 가족이 오막살이에 살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햇살이 비칠 때면 담쟁이 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방바닥에 초록빛 무늬를 만들었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음침했다. 특히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지면, 그 초록빛 무늬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벽을 타고 움직이는 듯했다.


문명과 단절된 공간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고, 신문도 없고, 모든 것이 없었던 그 집. 1960년대 초,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절, 그 집은 우리에게 피난처이자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물은 집 뒤편에 있는 우물에서 길어와야 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은 어린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지만, 누나는 능숙하게 해냈다. 그 우물물은 차갑고 달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보다 맛있는 물을 마셔본 적이 없다.

화장실은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재래식 변소였다. 밤에 볼일을 보러 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손전등도 없었기에 달빛에 의존해야 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이 집엔 아무도 살려 하지 않을까?"

어머니는 가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우리는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이 집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걸 느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에는 동정과 함께 묘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밤의 의식

밤이 되면 우리 가족만의 의식이 시작되었다. 전기가 없었으므로 해가 지면 곧 어둠이 찾아왔다. 일찍 밥을 먹고 우리는 거의 일곱 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유일하게 있던 건전지 라디오에서는 하필이면 납량특집 방송극이 많았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엄마는 특별한 날에만 라디오를 틀어주셨고, 그때마다 우리는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다른 세상으로부터 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만적의 난이 일어났던 고려 후기, 궁궐에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역사물과 괴담들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키워주는 동시에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무신의 난, 정중부의 난 등 온갖 종류의 난과 귀신들 이야기가 난무하던 저녁시간이 지나고 잘 때가 되면, 엄마가 누나와 나를 양쪽에 두고 다독거려 주셨다.

"아무것도 아니야, 잠을 자렴."

속삭이듯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조금 지나면 어김없이 그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

저벅저벅.

천장에선 쥐들이 화드득 도망치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2층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맑고 순수해서 더욱 으스스했다.

엄마는 우리를 꼭 껴안고 우리의 귀를 막아주셨다.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다같이 주기도문을 외우자 하면 우리는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엄마를 따라 기도문을 외웠다. 하지만 엄마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엄마도 무서워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밤만 되면 들려오는 그 소리에 우리는 어김없이 귀신을 생각했다. 성인인 엄마도 무서워했던 그 소리들.

"엄마, 저기 누가 있어요?" 내가 물으면 엄마는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바람 소리야. 이 집은 오래되어서 소리가 많이 나는 거야."

하지만 바람 소리치고는 너무 규칙적이었고, 너무 의도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 같았다. 발걸음은 항상 같은 패턴이었다. 발을 끄는 듯한 소리 후엔 저벅 저벅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후다닥 천장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소리…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나는 기도문을 외우는 자세로 이불 밑에서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엎드려 있다가 그 자세로 잠들기도 했다.

그 소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끝내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우리와 함께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수,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