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어머니의 노래
아버지가 스위스로 떠난 후, 어머니는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했다. 스물대 후반의 젊은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엄마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의 무게를 느꼈다. 엄마는 절대 우리 앞에서 힘들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지만, 가끔 혼자 계실 때 한숨 쉬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미군 부대에서의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어의 장벽도 있었고, 문화적 차이도 컸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견뎌내셨다.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엄마의 어깨가 조금씩 굽어가는 것을, 손이 거칠어지는 것을, 그리고 가끔 먼 곳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을. 하지만 우리 앞에서만큼은 항상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셨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산장에서..."
엄마가 부르시던 이 노래와 저녁 산책을 할 때 주로 불러주셨던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는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다. 담배밭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노래 소리는 우리에겐 평안의 신호였다.
그 노래 가사가 우리 상황과 얼마나 비슷했는지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정말로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산장에서,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아빠를 기다리며 살아가시던 엄마의 심정이 그 노래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노래에는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희망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다. 우리를 향한 사랑,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그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때로는 비 오는 밤에, 때로는 달빛이 유난히 밝은 저녁에, 엄마의 노랫소리가 산장 전체를 감쌌다. 그 소리를 들으면 온 세상이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엄마의 목소리가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막 같았다.
엄마가 가끔 가져오시던 미군 부대의 물건들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다. 초콜릿, 껌, 통조림, 빵... 그런 것들은 우리가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신기한 것들이었다.
"이거 봐, 오늘은 이런 것도 있어." 엄마가 작은 포장을 꺼내실 때마다 우리는 눈을 반짝였다.
그런 순간들이 산장의 음산함을 잊게 해주었다. 엄마의 사랑이 담긴 작은 선물들은 우리에게 세상이 아직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크리스마스 때 가져오신 작은 산타클로스 인형이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하얀 수염을 기른 그 작은 인형은 우리에게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그 인형을 보며 우리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세상 어딘가에는 선물을 주는 할아버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우리가 그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셨다. 그 미소 속에는 미안함과 사랑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이 작은 기쁨이라도 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밤에 괴상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엄마는 우리를 꼭 껴안아 주셨다. 엄마 자신도 무서워하고 계셨지만, 우리에게는 용기를 주려고 노력하셨다.
"괜찮아, 엄마가 있어." 주기도문, 사도신경도 외웠지만 우리에게는 엄마의 그 말 한마디가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었다.
엄마의 품은 따뜻했고 안전했다. 그 품에 안겨 있으면 어떤 무서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특히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면, 엄마는 우리를 양쪽 팔로 감싸 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콩쥐팥쥐 이야기, 흥부놀부 이야기, 그리고 먼 나라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까지. 엄마의 목소리는 바람소리보다 크고, 천둥소리보다 따뜻했다.
세 식구는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긴 밤을 견뎌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가족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어느 날 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가 엄마가 혼자 울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엄마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항상 강하기만 했던 엄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사진을 손에 들고 계셨다. 그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며 조용히 흐느끼고 계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엄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급히 눈물을 닦으셨다.
"엄마, 괜찮아요?"
"응, 괜찮다. 그냥... 아빠가 보고 싶어서."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슬픔을 이해했다. 엄마도 나와 똑같이 무섭고, 외롭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숨기고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것을.
그 괴기한 산장에서의 시간은 7년 남짓한 기간이었으며 그 시간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우리는 결국 그 집을 떠났다. 아버지가 스위스에서 돌아오시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게 되면서 시내의 다른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산장을 떠나는 날, 나는 마지막으로 그 집을 둘러보았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벽, 삐걱거리던 계단, 이상한 소리가 나던 2층...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잘 있어, 막내야." 나는 담배밭을 향해 작게 인사했다. 멀리서 꼬끼오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짐을 싸는 동안 우리는 하나하나 추억을 정리했다. 엄마가 가져다 주신 작은 선물들, 내가 그려놓은 낙서들, 그리고 막내가 좋아하던 모이통까지.
이사 트럭이 와서 우리의 얼마 안 되는 살림을 실어갔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 괴기한 경험들이 정말 현실이었는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어린 마음의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생명의 연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느꼈다.
중년이 된 지금도 나는 가끔 꿈에서 그 산장을 방문한다. 꿈 속의 산장은 더 이상 괴기하지 않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엄마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막내의 꼬꼬댁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멀리서 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웃고 계신다.
대학에 들어간 후 그 산장을 다시 찾아간 적이 있다. 수십 년의세월이 흘렀지만 그곳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많이 변해 있었다.
담쟁이 넝쿨은 아직 온 집을 뒤덮었고, 지붕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문은 반쯤 열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살던 방, 엄마가 요리하던 부엌, 막내가 잠들던 마루... 모든 것이 작아 보였다. 어린 시절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공간들이 이제는 아담하게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 소리가 오히려 반갑게 들렸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담배밭은 이제 다른 작물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 너머로는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며 나는 엄마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괴기한 산장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무서운 경험의 장소였을까? 아니면 삶의 신비로움을 깨우쳐 준 특별한 공간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내 유년의 그림자이자 동시에 빛이었다. 무서움과 아름다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 모든 경험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괴기 산장'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이면서 동시에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특별한 장소. 두려웠지만 그 덕분에 용기를 배우고, 외로웠지만 그 덕분에 사랑의 소중함을 깨달은 그런 곳.
이제 어린 시절에 대한 내 이야기를 마친다. 1950년대 말,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았던 그 시절, 한 소년이 경험했던 기이하고도 소중한 기억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순수했고, 무서웠지만 신비로웠다.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였고, 서로를 사랑했다.
괴기 산장, 내 유년의 그림자는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우리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내 아이들에게도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던 아이들도 결국에는 막내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고, 할머니의 사랑에 감동했다.
"아빠, 할머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래, 할머니는 정말 강한 분이셨어. 하지만 할머니도 무척이나 무서움을 타셨지만 어쩌면 할머니도 고모와 내가 있었기에 그 무서움을 견뎌내신 것 같아. 너희들을 키우면서 그걸 느끼게 되네…."
잘 가, 나의 유년시절. 고마웠어, 괴기 산장의 모든 기억들아.
그리고 고마웠어, 산장 주변의 모든 자연과 동네, 그리고 친구들과 방천, 앞산 비행장과 공동묘지… 나의 삶에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줘서…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끝
"이 이야기는 1950년대 말 한국의 한 가족이 겪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회고록입니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넘쳤던 그 시절,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한 기억들을 담았습니다."